실업인 장로 중심 ‘신앙동지회’ 창간 산파역할
쉽지 않았던 복간 작업…교단지로 위상 강화

 

1. 파수군 표지
<파수군>(The Watchman)이라는 이름을 가진 간행물입니다. 열흘에 한 번씩 발행되던, 오늘날에는 다소 낯선 순간(旬刊)지였고, 교계소식과 인터뷰를 비롯해 설교, 논설 등 다양한 내용들을 게재한 일종의 종합매거진이었습니다. 발행인인 안용준 목사는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사랑의 원자탄’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실제로 손양원 목사가 가족들에게 보낸 옥중편지 등이 세상에 처음 소개된 것도 바로 ‘파수군’을 통해서였다고 합니다. 편집위원 중에는 성경주석가로 명성을 떨친 박윤선 이상근 등의 이름도 보입니다.

1965년 1월 4일 탄생한 ‘기독신문’은 바로 이 ‘파수군’을 인수받아 발행되기 시작합니다. 과거 교단지이던 <기독공보>를 예장통합 측이 가져가면서, 언론의 부재로 인한 곤란을 겪던 당시 총회 인사들이 고심 끝에 생각해낸 방법이었습니다. 새로운 주간신문 발행 허가를 받는 일이 당시로서는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독신문 3대 이사장을 지낸 고 우성기 장로는 회고를 통해, 1963년 부산에서 모인 실업인 장로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신앙동지회(당시 회장:백남조 장로)가 기독신문 창간의 산파역할을 했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2. 기독신문 창간 멤버
신앙동지회는 1963년 3월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부부수련회 기간, 신문 창간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서울 장충동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신문 명칭을 ‘기독신문’으로 정합니다. 과거 1938년부터 약 4년 동안 목사이자 소설가로 유명한 전영택이 발간한 동명의 초교파신문이 존재한 바 있기에, ‘기독신문’은 그리 낯선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초대 이사장은 김윤찬 목사, 사장은 김정국 장로였습니다. 사진에는 신문사 창립멤버들의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타블로이드 배판으로 제작된 창간호는 단 2개면으로 소박하게 출발합니다. 역사적인 첫 지면은 당시 총회장이기도 했던 김윤찬 목사의 신년사, 박형룡 총신대학원장의 축사, 인기 칼럼으로 먼 훗날까지 자리 잡게 되는 ‘방패’, 기독신문 실행이사 선출보고 등이 장식했습니다.

김정국 장로는 창간사에서 독자들에게 “개혁신앙의 보수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싸우겠습니다. 보도의 정확을 기하겠습니다”라는 두 가지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이 담긴 창간 당시의 사시, ‘개혁신앙의 보수, 교회의 단결, 성도의 교제’는 지금까지 역대 기독신문 가족들이 계승하여 간직하고 있습니다.
 
3. 초창기 취재기자 모습
기자석에 앉은 초창기 선배 기자의 취재에 열중하는 모습이 요즘 동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모든 환경이 어려웠던 시절, 기독신문은 개척자들의 헌신과 수고를 통해 조금씩 발전해 나갑니다. 제33호부터 지면을 4면으로 증면하고, 이듬해에는 제호를 <기독신보>로 변경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큰 고비 하나를 넘어야 했습니다. 1972년 3월 25일자로 326번째 신문까지 만들고 나서는 ‘시설미비’라는 공식적인 이유로 자진 폐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초창기 본지 주필과 사장을 지낸 채기은 목사는 지령 1000호 특집호에서 “당시 발행인이 운영진과의 의사대립으로 발행을 자진 취소하는 신청서를 공보부에 제출함으로써 정간이 됐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4. 복간 후 직원회의
다행히도 정간 사태는 그해 10월 7일자로 복간호가 발행되면서 약 반 년 만에 끝납니다. 하지만 복간 작업은 쉽지 않았습니다. 지면 크기가 기존보다 절반으로 줄어 타블로이드판으로 제작되었으며, 지령을 정하는데도 혼선이 있었습니다. 결국 타블로이드판 발행은 16호까지로 마감되고, 1973년 2월 10일자부터는 원래의 크기로 돌아갑니다. 지령 또한 복간호부터 다시 산정하기로 해, 이 기준에 따라 오늘 기독신문 지령 2000호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사진에는 복간 직후 회의를 갖고 있는 당시 직원들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5. 총회사무실과 기독신보 현판
이후 발행인을 총회장으로 정하고, 사무실을 총회회관으로 옮기면서 본지는 본격적으로 총회 기관지로서 위상을 드러냅니다. 총회에서도 교단지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1985년 열린 제70회 총회에서 전국교회 제직 이상은 본지를 의무적으로 구독하도록 결의한 일이 대표적입니다.

그 가운데 신문 규모는 점점 커져 당초 4면이었던 지면이, 1986년 2월 1일자에는 8면으로, 3년 후에는 12면, 다시 3년 후인 1992년 6월 20일 자에는 16면으로 증면됩니다. 1988년부터는 출판국을 신설해 수많은 단행본을 발행하며 또 다른 형태의 문서선교에 힘을 씁니다.
 
6. 지령 1000호 기념식
지령 1000호가 발행된 1993년 11월 27일 기점으로 신문사는 더욱 가파른 도약의 길을 걷습니다. 기념식과 함께 ‘21세기 한국교회 무엇을 준비할까’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한 것이 신호탄이었습니다. 특히 1997년에는 제호를 원래의 명칭인 <기독신문>으로 환원하면서, 시대흐름에 맞춰 전면 가로쓰기 체제에 돌입하는 혁신을 맞이합니다.

또한 이 무렵 해외지사 설립, 문서선교의 확장, 웹서비스 개시 등 많은 사업들이 함께 진행되면서 기독신문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모합니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 쌀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고, 이를 전달하고자 직접 북녘 땅을 밟고 돌아온 소중한 추억도 있습니다.
 
7. 50주년 비전선포식
항상 좋았던 순간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교단 정치권과의 갈등으로 이사회와 경영진이 한꺼번에 해임되는 사건이 수차례 발생했고, 이단시비로 인해 사무실 앞이 시위장소로 변하는 일도 겪었습니다. 특히 2008년에는 기독신문 정상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무리한 구조조정 요구에 시달린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기독신문 구성원들은 때로 노동조합까지 결성하며 언론 침해에 맞서고, ‘불 꺼진 총회’를 향해 정론직필의 자세로 항변하는 등 중심을 지키며 난관을 극복해왔습니다. 한 편으로는 미디어팀을 새롭게 구성해 영상뉴스 제작과 스마트폰 구독 서비스를 실시하고, 실시간 뉴스체제를 준비하는 등 새로운 문화 환경에 대응하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습니다.

기독신문 창립 50주년과 지령 2000호를 맞은 올해, 기독신문 가족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총회 및 전국교회 독자들의 성원을 잊지 않고 열심히 섬길 것을 다시금 다짐합니다.

8. 기독신문 전체 임직원 사진
2015년 2월 현재 지령 2000호를 만든 기독신문 임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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