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살리는 호흡이 있는 신문 되겠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신문 환경 속 고민 계속 …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강석근 편집국장
2035년 3월 4일 황사주의보가 예고된 가운데 강진실 목사는 새벽예배를 인도하고 목양실에 앉았습니다. 의외로 봄날의 햇살이 밀려들어 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강 목사는 다소 신맛이 느껴지는 과테말라산 커피를 마시며 벽면에 붙어있는 대형 모니터에 대고 <기독신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기독신문 헤드라인 뉴스입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음성명령을 지원하는 기독신문 애플리케이션에서 기사를 브리핑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오전에 평양과 은율에서 각각 평양노회와 소래노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이어집니다. 평소 북한 지역 복음화에 남다른 열정을 가졌던 강 목사는 3D 홀로그램 영상으로 북한 교회와 관련된 세부적인 기사와 콘텐츠를 훑어본 뒤, 재차 상정된 안건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그리고 노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문산역에서 평양으로 이동하는 KTX 안에서 스마트시계에 자동으로 올라온 몇 개의 기도제목을 보고 총신대 신학대학원 제108회 동기 목회자들과 공유하는 그룹 플랫폼을 방문합니다. 목포 유달산교회 정평화 목사가 북한 교회 재건에 보태라며 1억원을 헌금했다는 토막 글이 올라왔습니다. 케냐에서 사역 중인 박리빙스턴 선교사도 나이로비한인교회 성도들과 함께 노회 개회시간에 맞춰 기도하겠다는 댓글이 떴습니다. 여기저기서 공유 글이 달립니다.

신문 환경이 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신문과 방송의 언론 매체들은 인터넷의 등장으로 불과 7년 만에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침마다 집으로 배달되던 신문에서 지금은 클릭으로 뉴스를 보고 접합니다. 4·6배판의 종이신문보다 인터넷의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본인이 관심있는 기사를 선별하여 읽고 추가로 동영상을 보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거기다 1인 미디어를 지칭하는 블로거들은 SNS를 기반으로 빠르게 정보를 실시간으로 알리면서 기사의 파급력이 한순간에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신문이 변하고 있습니다.

저는 88올림픽이 열린 이듬해 기독신문에 입사했습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출범을 앞두고 한국교회가 시끌벅적한 가운데 새내기 기자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리고 25년이 흘렀습니다. 8면과 12면을 격주로 발행하던 지면은 그 사이 28면이 되었고, 단순히 종이신문에 국한되어 왔던 <기독신문>은 이제 모바일 페이지와 스마트폰에서도 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지난해부터 입체적인 뉴스를 전달하고자 영상뉴스를 가동하는 실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독신문>은 예장합동의 교단지입니다. 그렇다고 총회 소식만 전하는 단순한 교단지가 아닙니다. 발행인이 바뀔 때 마다 다소 흔들리는 경향도 있었지만 그래도 공의를 추구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1965년 창간하여 제2000호를 발행까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기쁨이 더 큰 지도 모릅니다.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할 때면 하나님의 편에서 생명력이 있는 진실된 글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부터 합니다. 이런 25년 된 ‘습관’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죽은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제(剝製)된 기사를 다루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께만 의지하며 지혜를 구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것마저 쉽지 않습니다. 홀로 가만히 있어도 “내 편이다”, “네 편이다” 하는 소리를 끊임없이 듣습니다. 신문이 발행될 때 마다 패대기질 당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러시아의 작가 고골리는 단식 끝에 43세의 젊은 나이에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남긴 유서에서 “죽은 혼이 되지 말라, 살아 있는 혼이 되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소설 <죽은 혼>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기독신문>이 영혼을 살리는 호흡이 있는 매체로 거듭날 것을 감히 약속드립니다. 죽은 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있는 영혼에 시계추를 맞추겠습니다. 비록 빠른 속도로 언론 매체가 변한다 할지라도 중심만은 바로잡고 비틀거리지 않고 공의롭게 걸어가겠습니다. 흔들릴 때마다 치도곤(治道棍)으로 다스려 주십시오.

예장합동과 도관(導管)을 매설해 온 <기독신문>이 창간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제 책상 뒤 켠에 차곡차곡 또아리를 틀며 쌓여있는 케케묵은 취재수첩을 헤아려 봤습니다. 200권이 훨씬 넘습니다. 제 키 만큼의 높이는 아니더라도 또다른 <기독신문>의 잔영이라고 생각하며 더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이제는 USB의 용량을 넓혀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계셨기 때문에 지금의 <기독신문>이 있는 것입니다. 2035년 그리고 다시 찾아올 창간 100주년을 바라보며 정진, 또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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