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과의원 정재영 장로

▲ 정재영 장로는 진료를 하며 스스럼없이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복음을 전한다. 단골 환자들 중 정 장로에게 사영리를 듣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다. 그렇게 전도가 돼 교회에 나가는 이들이 많다.

 

정직으로 일궈 전설이 된 ‘시장통 동네치과’ 
‘변심하지 말자’ 낮아지며 신앙도 진료도 한결같이 진력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며, 설렁탕 국물을 뚝배기채 후르르 들이키는 모습이며, 치과의사 정재영 장로(원남교회·정치과의원)는 가식 없이 소탈했다.

정재영 장로는 세상 표현으로 ‘잘난’ 사람이다. 전북 진안 명문가 출생에 경복고, 서울대 치대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거기에 신학까지 공부하고,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도 명망이 높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도 전혀 이상할 것 없지만, 그러나 그는 오히려 높아짐과 화려함을 거슬러 살아왔다.

정 장로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하숙집 근처에 있는 원남교회(권기웅 목사)를 무작정 찾아갔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기독교를 한번 믿어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50년 넘게 원남교회를 섬겼다. 꾸준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교회는 그를 40세에 장로로 세웠다. 특별히 정 장로는 전도에 열심을 내 어느 해는 3개월에 248명을 등록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장로로 꼬박 20년을 섬긴 후 정 장로는 장로 은퇴를 선언했다.

“선배 장로 한 분이 조기 은퇴를 실천하셨어요. 저도 장로 6년차 때부터 60살이 되면 장로직을 내려놓겠다고 말을 하고 다녔어요. 장로직을 명예로만 여길까 염려가 됐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고 싶었어요.”

교회의 간곡한 요청에 정 장로는 은퇴장로 대신 휴무장로 명칭을 받아들였다. 정 장로는 “삐쳐서 교회 안 나오는 집사들 찾아다니는 게 휴무장로의 일”이라며 웃어보였다. 최근에도 라면 한 꾸러미를 들고 무작정 한 집사의 집을 찾아가, 저녁을 함께 했다. 격식을 차려 전화를 하고 대화를 하는 대신, 사랑으로, 몸으로 다가간 것이다. 예상하듯 그 집사는 그 다음 주일 다시 교회에 나왔다.

신앙적 열정은 신학에 대한 갈망을 낳기도 했다. 정 장로는 대학 시절 야간으로 칼빈대를 다녔고, 치과대학 졸업 후에는 총신신대원에 진학했다. 비록 목회자의 길을 걷진 않았지만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제대로 눈을 뜨게 됐다. 그런 깨달음은 치과 의사로 살면서 행동으로 나타났다.

“오늘은 누구를 행복하게 할까, 직원들과 환자들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까가 고민이에요.”

군대에 입대한다는 젊은이에게 용돈을 쥐어주고, 돈이 궁한 환자들에게 병원비를 깎아주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며칠 전에는 30년 단골인 한 90대 할머니를 대신해 아들이 약을 타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이래저래 할머니 소식을 들은 정 장로는 병원문을 나서는 아들에게 ‘어머니 자장면이라도 사 드리라’며 3만원을 쥐어줬다. 그뿐 아니다. 정 장로는 매주 월요일 진료 수익을 따로 모아 연말에 구제비로 사용하고, 고향에서는 부친의 유업을 이어받아 장학사업도 벌이고 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정신은 진료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의사 초창기 때 정 장로는 어려운 환자를 대할 때마다 기도를 했었다. ‘하나님, 이를 뽑아야 할까요, 말까요. 나중에 뒷말이 없으려면 이를 뽑는 게 편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은 ‘네 이라면 어떻게 하겠니, 네 아들 이라면 어떻게 하겠니’였다. 하나님은 늘 그 말씀이셨고, 그 후로 쭉 정 장로는 더디고 귀찮지만 최대한 환자 편에서 생각하고 치료 방법을 선택했다.

“정직도 중요해요. 잘못 진료했을 때는 변명하기보다 정직하게 잘못을 시인하는 쪽을 택했어요. 변명하고 정직하지 못하면 고발로 번지게 되고, 더 큰 문제만 생길 뿐이죠.”

 

정직하게 살려는 마음은 세상 밖으로도 그대로 드러났다. 한때 정치과의원은 치과계에서 전설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환자가 하도 몰려 접수를 받다가 직원이 쓰러질 정도였다. 탈세 유혹에 빠질 만도 하련만 정 장로는 정직을 택했다. 시장통 동네 치과가 거액의 세금을 내니 세무서에서도 놀랄 지경이었고, 표창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정 장로는 “재벌과 돈으로는 경쟁을 안 하지만, 정직으로는 겨루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돈으로는 등수에 따라 희비가 갈리지만, 정직은 1등이 많을수록 좋은 일”이라고 덧붙였다.

정치과의원은 수십년 째 서울 종로4가 광장시장 입구에 있는 상가건물에 입주해 있다. 더 좋은 지역에 더 번듯한 건물로 옮길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았고, 정 장로는 순종했다.

“옛날에는 지역 환자가 80%였는데, 지금은 많이 떠나고 20%밖에 안돼요. 그래도 단골 환자들이 양평이나, 군포, 시흥에서도 찾아와요.”

정치과의원은 그동안 이렇다 할 광고를 하지 않았다. 지금 있는 간판도 사람들이 병원을 잘 못 찾아온다는 이야기에 내다 걸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막에 비를 내려주시듯 환자들을 보내주셨고, 환자들의 입소문을 통해 또 다른 환자들이 찾아왔다.

“치과 개업 4년 만에 개업 준비로 진 빚을 다 갚았어요. 그때까지는 치열하게 기도를 했는데, 빚을 다 갚으니까 변심이 되더라고요. 그때 ‘하나님, 돈을 너무 많이 주셔서 홍수 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어요.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게 하셨어요.”

정 장로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너, 변심하지 말라’고 하신다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추스른다고 말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이 성전으로, 그 성전을 사모하며 살겠다는 다짐이자,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을 향한 깨우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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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 성찰, 시에 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를 썼어요. 등단을 늦게 했을 뿐이자 평생 시를 떠나본 적이 없어요.”

시를 쓰는 목사와 장로는 많지만, 멋스러운 취미거리로 삼는 경우가 많고 좀 치열하다 싶어도 이름 없는 문예지를 기웃거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재영 장로는 좀 다르다. 1998년 <조선문학> 신인상을 수상한데 이어 2005년 권위 있는 문예지인 <현대시>로 등단했다. 올해 펴낸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를 비롯해 시집은 11권을 냈고, 시에 대한 학구열도 남달라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문학석사 학위까지 받았다.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도 분명해, 한국기독시인협의회에 오랫동안 몸담았고 현재는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정 장로는 “주께서 기독시인협회에서 목회를 하라고 부르신 것 같다”고 말했다. 목회하는 마음으로 시인들을 만나고 있다는 표현이다.

 

수상 경력도 많지만, 특별히 정 장로는 최근 <현대시>를 아끼는 시인들이 <현대시> 300호 발간을 기념해 제정한 제1회 현대시회 시인상을 수상했다. 쟁쟁한 경쟁작들 가운데 그의 시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문학적 열정이 담긴 점이 높이 평가받았다. 수상작 중에 <우리17-비명(碑銘)>이라는 작품이 있다.

마지막에 찍힌 큰 쉼표는 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단순히 한 호흡 쉬는 쉼표이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 품 안에서의 안식임을 안다. 그가 다른 시인들과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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