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황포돛배’를 부르고 숭실중학에 입학했다


나는 칠남매 중에 막내로, 믿지 않는 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방은 물론 부엌과 대문간에 커다란 떡시루와 막걸리를 놓고 무엇인가를 늘 빌곤 했다.

“뭐예요? 엄마”

“이렇게 귀신들을 잘 먹게 해줘야지만 집안이 편안하단다. 안방에 가면 안방 귀신이 있고, 건넛방에 가면 건넛방 귀신이 있고, 부엌에는 부엌 귀신이 있단다.”

어머니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나는 그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빌기를 마치고 막걸리를 뿌린 후엔 그 떡들을 잘라서 이웃집에 나눠주셨다. 나는 심부름하는 것을 좋아했었기 때문에 온 동네 떡 나눠주는 일을 도맡아 했었다.

설이 되면, 우리 집은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다음날엔 언제나 어머니는 막내인 나를 데리고 무당집에 가셔서 풍수막이를 하셨다. 어머니는 그 풍수막이로 일 년 동안 우리 집안에 들어오는 모든 액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우리 집 바깥채에는 갈 곳 없는 할머니가 외아들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낮 동안 우리 집 일을 돕기도 하고, 한가할 때엔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시기도 했다. 어머니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시다 이따금 대를 내리곤 하셨다.

“성냥님, 성냥님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어머니는 성냥개비에 대를 내린 후, 작은 성냥개비를 보며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나는 이런 어머니 밑에서, 그리고 믿지 않는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김동수 장로는 가족과 함께 정동제일교회를 섬기고 있다. 아내와 아들, 딸, 사위와 함께 했다.

초등학교 다닐 시절, 나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죽음’이었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려웠다. 도깨비 이야기나 귀신 이야기를 들은 날이면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불을 끄고 잠에 빠지면 금방이라도 귀신이 다가와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상하게도 나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종소리는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나는 누가 시킨 것도,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스스로 교회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후로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덧 중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공부 꽤나 한다는 아이였지만 막상 중학교 입학시험에는 1차, 2차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이제 남아있는 학교는 계속 미달이 되어 추가모집하는 숭실중학교 하나 밖에 없었다.

내가 숭실중학교 면접시험을 보기 위해 대기실에 앉아있을 때였다. 지루하게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고는 선생님이 노래를 시키기 시작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노래를 불렀고 내 차례가 왔다. 그때 내가 집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는 ‘동백아가씨’와 ‘황포돛배’였다. 나는 동요 대신 청승맞은 가요 곡조를 뽑았다.

“마지막 석양빛을 기폭에 걸고…”

노래가 끝나자마자 선생님이 나를 붙들었다.

“너, 몇 번이야?”

그해 나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했고, 내 뜻과는 무관하게 숭실합창단 1회 단원이 되어버렸다. 숭실중학교는 미션스쿨이었기 때문에 주말마다 우리는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찬송가와 성가곡을 불렀다. 그런 생활 속에서 나는 참 열심히 예수를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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