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고독하다. 네트워크의 홍수 속에서 고독이라는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눈만 뜨면 먹고 즐길 수 있고 돌아 볼 사이 없이 경쟁하기도 바쁜데 고독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존재감 없는 삶을 창살없는 감옥으로 여기며 벗어나려 몸부림 친다. 많은 선각자들은 고독이 고립으로부터 온다는데 인식을 같이 한다.

폴 틸리만은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말하고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이라고 했으며 유진 피터슨은 “고독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혼자가 되는 것이고, 외로움은 타인에 의해서 혼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고독은 정신적으로나 육신적으로 홀로 고립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인간은 북적대며 살지만 너무나 고독해서 죽어 가고 있다(슈바이처)” “위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외로웠고 위대한 작품들은 고독속에서 태어난다(토저)” “영감은 고독 속에서 얻어 진다(괴테)” “고독은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는 샘(마가렛 뮬락)” “고독이란 하나님에 대한 본향의 향수(젤러)” 등. 이처럼 고독에 대한 견해는 많지만 평가는 부정적이지 않다. 생각하고 수용하는 정도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다.

고독을 미화하고 긍정의 삶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는 좋지만 역시 고독은 괴롭고 힘든 고통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인간은 고독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가정을 꾸려 자녀를 낳는 것이나 심지어 범죄행위까지 고독으로부터 탈출을 위한 행위들이라는 것이다.

<현대인의 고독>을 쓴 칼 로저스는 고독을 스스로의 소외와 함께 할 대상의 부재로 구분하고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존엄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교회는 고독하다. 문명과 함께 부흥해 왔지만 지금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그러나 해법은 있다. 로저스나 솔로몬의 말처럼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고독은 잘 치유하면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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