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직후 혼란의 시대를 사는 한 여인의 삶을 통해 불신의 세상을 그린 박경리의 단편 ‘불신시대’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치유해야 할 병원과 종교의 불의한 세태를 고발하고 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인륜과 종교적 양심까지 저버리는 의사와 승려 등 주변인들의 세태가 오늘날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격변의 현대사를 이념적 시각으로 조명한 조정래의 장편 한강 3부는 긴급조치에서 광주사태 직전까지를 불신의 시대로 그리고 있다. 군사정권과 자유를 요구하는 백성들의 요구가 대립하는 긴장의 공간을 불신의 벽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늘날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 경영자와 노동자의 대립과 불신이 유형은 다르지만 위기 앞에서 배신하고 갈등하며 먹고 먹히는 세태가 그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불신은 의심에서 시작돼 불만을 먹고 자라다가 탐심의 시녀가 된다. 적당한 의심은 진실을 추구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과도한 의심은 불신으로 이어진다. 의심이 생기면 마음의 평정심이 깨지고 평정심이 깨지면 불만이 엄습한다. 불만은 진실의 눈을 가리고 진실이 가려지면 거짓과 친숙하다. 결국 불신은 자기를 정당화하거나 상대를 제압하고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된다. 그래서 불신의 그늘 속에는 언제나 갈등과 분열이 횡행하고, 무력하고 메마른 감정의 물이 고여 있다.

현대 사회를 믿을만한 사람도 없고 믿을 대상도 없는 불신의 시대라고 한다. 세대 간의 불신, 이성 간의 불신, 그리고 직장에서의 불신, 가정에서의 불신, 심지어 신성해야 할 종교 내부에서도 불신의 벽은 있다.

엊그제 월요일 아침 총회 산하 직원들이 함께 드린 연합예배에서 안명환 총회장은 3개월여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느낀 고충을 밝히면서 “한 말을 하면 다른 말이 생기고, 오늘 한 말이 내일이 되기도 전에 밖으로 돈다”며 총회 안에 불신의 벽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력감이 있던 총회에 지난해 덮친 진통은 오히려 불신의 벽을 키웠다. 불신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있어야 하는데 희생은 믿음에서 나온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