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환 편집국장

몇 해 전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사격 당시 해외에는 한반도에 곧 전쟁이 터질 것처럼 알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위험지역에 있는 우리는 긴장은 좀 했지만 오히려 무덤덤했다. 오래전부터 계속된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생긴 타성 때문이었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천안 논산 간 고속도로를 가다보면 논산 톨게이트 못 미쳐 지독한 구린내 존이 있다. 가끔 지날 때마다 차속까지 파고드는 독한 냄새가 보통이 아닌데 도대체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톨게이트 관문을 지키는 직원의 말로는 그 지역은 양계농장이 집중된 곳으로 연중 냄새가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방문자들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만 그곳 사람들은 냄새의 역겨움을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일종의 냄새의 타성에 젖은 것이다. 방귀 냄새도 자기 냄새와 다른 사람의 냄새가 다르다더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구린내가 자신들의 삶의 일부가 되면서 거부감이 없어진 것이다.

타성은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습성으로 굳어진 것으로, 틀에 박힌 태도나 방식을 의미하는 매너리즘과 비슷한 말이다. 타성은 감각을 무디게 하고, 무뎌진 감각은 분별력을 떨어지게 한다. 분별력이 떨어지면 정의와 불의를 구별하지 못하고, 그것은 곧 죄에 대한 무감각증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타성이 깊어지면 그런 스스로의 모습조차도 모른다는 것이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교회는 타성에 젖어있다. 신앙은 칼날과도 같아서 매일 닦고 갈지 않으면 녹이 슬고 무뎌지기 마련이라는데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새벽기도의 열기가 식고, 젊은이들은 떠나고 있다. 도덕과 윤리는 바닥을 치고, 예배에 대한 경건성도 약해지지 않았는가.

‘생각보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의 저자 존 오트버그 목사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도전은 ‘영적 타성’으로 어느 면에서 그것은 영적 타락보다 더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타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본능을 드러내기보다 억제하며 사는 것이다. 안락은 타성을 굳게 하지만 시련은 타성을 치유하기 때문이다. 욕심과 쾌락을 쫓기보다는 고행과 너그러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항상 깨어있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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