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아픔이 발길마다 묻어난다

강원도 답사 출발지 철원에는 전쟁 비극 속 신앙지킨 순교자 숨결 그대로
무심한 관리에 스러져가는 철원제일감리교회…태백 예수원서 신앙단련을


산 좋고 물 맑은 고장 강원도, 천혜의 비경을 곁에 둔 그곳의 부름에 우리는 응할 수밖에 없다. 거친 파도가 넘실되는 동해바다부터 태백산맥을 이루는 국토의 명산에 이르기까지 태곳적 이야기를 간직한 자연의 손길이 온몸을 스치며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강원도가 자랑하는 웅장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국 교회의 유서 깊은 수도원들도 터를 잡고 있다. 우거진 산림이 뿜어내는 맑은 공기와 호흡하며 심신을 수련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우리의 방문을 언제나 기다린다.

한편으로 분단국가의 축소판처럼 38선을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강원도는 한국전쟁이 남긴 민족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꿋꿋이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의 숨결이 고이 숨 쉬고 있고, 민족의 상흔이 새겨진 한국 교회 문화유산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철원지역은 강원도 답사의 출발지로 제격이다.

① 대천덕 신부와 성미가엘신학원 학생들이 일군 예수원은 자연친화적인 주변 환경과 숙소가 돋보여 해마다 많은 교인들이 찾고 있다.
② 1959년 설립된 대한수도원 소성전. 대한수도원의 지원, 영향을 받은 철원지역 교회들은 소성전과 비슷하게 예배당을 건축했다.
③ 철원제일감리교회 예배당 터는 서양 유적을 연상시킬만큼 멋스럽지만 이곳에 담긴 민족 비극의 역사는 반세기 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철원제일감리교회

서울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100-2번지, 한국동란때 파괴되어 그 잔해만이 남아 있는 철원제일감리교회 유적터로 항했다.

철원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교회인 철원제일감리교회의 첫 예배당은 1920년에 세워졌으나, 현재 일부 남아 있는 예배당은 1936년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건립되었으며 당시 교인수가 무려 5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8·15 해방 전까지 철원지역의 선교활동과 육영사업을 이끌었던 철원지역의 대표적인 교회였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괴물은 철원제일감리교회의 영광을 한순간에 앗아갔다. 공산치하에서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반공투쟁이 전개되면서 총칼을 겨눴으며, 교회의 지하실은 양민학살의 장소로 사용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리석으로 웅장했을 교회 정문을 중심으로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는 예배당에 서니 콧등이 시큰거렸다. 포탄이 지나간 듯 무너지고 빛바랜 교회의 기둥에 기대어 자란 돌이끼가 주인행세를 하는 한국 교회의 유산은 민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더욱 애처롭게 느껴졌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고 적힌 명패가 무색하게 관리 감독이 소홀하다는 것이다. 이곳을 찾는 성도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설치된 간이 기도실에는 거미줄이 사방으로 퍼져 있고, 주차장 입구 벽면에는 거대한 천자락이 유적지를 훼손하고 있어 아쉬움을 더했다.

철원장흥교회·대한수도원

▲ 교인들이 돌을 쌓아 올려 지은 장흥교회 예배당과 그리스도 정신을 주민들에게 심어준 서기훈 목사의 순교기념비.
철원제일감리교회에 이어 철원지역에 두 번째로 설립된 철원장흥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흥교회는 1920년 지은 교회로 현재 예배당 건물은 1955년 재건했고, 다시 1983년 증축을 했지만 외관은 50여 년 전 그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교회 외벽은 교인들이 직접 교회 앞 냇가에서 주운 돌을 쌓아 올린 것이라고 한다.

철원제일감리교회가 페허가 된 후 장흥교회는 지역의 모교회이자 선교적 역할도 감당했다. 특히 교회의 역사적 가치는 한국동란 중에 희생한 청년들을 위한 충혼비와 서기훈 목사의 순교기념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방직후 신한애국청년회와 대한청년단을 조직해 반공투쟁을 벌이다 희생된 교회 청년들의 얼을 기리고 있는 충혼탑은 올해 9월 새로 건립됐다. 난세에 교회를 지탱한 박경용 목사와 서지훈 목사의 이름과 함께 교회 청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공산군과 마을 청년들 사이에 화해를 도모하고 서로간의 희생을 피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정신을 알린 서기훈 목사의 순교기념비에는 순교 전날 서 목사가 지은 시가 기록돼 있다.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 서 목사는 마지막 순간에도 ‘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 죽음이 아니요.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다’라고 읊고 있다. 이 시구에서 마을청년들을 위해 거룩한 희생을 선택한 서기훈 목사의 숭고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철원장흥교회에서 지근거리에 위치한 대한수도원은 가까운 거리만큼 역사적으로 장흥교회와 맥을 같이 한다. 1940년 장흥교회 담임이었던 박경용 목사를 비롯한 신앙 동지들이 조선광복을 위해 조선수도원을 설립한 것이 대한수도원의 시초다. 초대원장으로 부임한 유재헌 목사도 박경용 목사와 고베에서 함께 신학을 공부한 사이다.

수도원은 일제시대와 한국동란을 거치는 동안 핍박을 받기도 했지만 수복 후 전진 전도사가 대한수도원으로 개칭 후 재건하기 시작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수도원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전진 전도사의 아들 최조영 목사가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지역 선교에 이바지해 월촌감리교회, 월하감리교회 등 철원지역 교회를 세우는 데 일조했고, 최근에는 중국 선교에도 나서고 있다고 한다.

한탄강변에 위치한 순담계곡의 절경 속에 지친 심신을 단련하고 기도와 봉사를 새 힘을 얻을 수 있어 매년 10만여 명이 교인들이 대한수도원을 찾고 있다.

천곡교회·예수원

이제 우리의 여정은 드넓은 동해바다가 춤추는 동해시로 향한다. 그곳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최인규 권사의 모교회, 천곡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따라 1933년 전 재산을 천곡교회에 헌금하고 복음을 전하던 최인규 권사는 일제로부터 신사참배 및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자 이에 항거하다 모진 고문을 당한고 만다. 그가 재판 중에서 일제의 만행을 꾸짖고, 옥고 중에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간수에게 호통 친 일화는 유명하다.

▲ 1982년 최인규 권사의 순교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기념비는 최 권사가 사용했던 강대상을 본 떠 만들었다.
1942년 고문으로 쇠약해진 최인규 권사는 옥고를 치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천곡교회 앞뜰에 곧게 선 최인규 권사 순교비가 신앙의 선배의 숭고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강원도 답사의 마지막 행선지는 1965년 대천덕 신부가 설립한 예수원이다. 태백 산자락을 굽이굽이 오르다보면 대천덕 신부의 추모비와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적힌 비문이 예수원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예수원은 노동과 기도의 삶을 통해 신앙을 담금질하는 수도원이다. 하루일과 역시 ‘노동은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다’라는 성 베네딕도 수사장의 가르침에 따라 하루 세 차례 예배와 노동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또한 삼종이라 하여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시 하루 세 차례 종이 울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기도한다. 예수원에서 기도만큼 중요한 노동시간에는 적성과 희망에 따라 자유롭게 예수원 사역에 참여할 수 있다.

유럽풍의 세련된 숙소가 아기자기하게 몰려 있고 쾌적한 공기가 감싸고 있어 찾아 온 이들의 만족도는 유달리 크다고 한다. 때문에 방문객 중 수련제도를 거쳐 예수원에서 생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지금도 예수원과 예수원이 운영하는 삼수령 목장에서 60여명의 사역자들이 땅을 일구고 성령의 단비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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