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교’에서 신앙의 선배를 만나다

‘호남지역 복음의 산실’ 전주 신앙문화유산 곳곳에 자리잡아
다가공원·신흥학교부터 예수병원·서문교회까지 숨결 그대로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일은 사실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비록 지금은 다른 세상에 있지만, 우리들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그들의 후손인 우리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 위해 값진 땀방울을 흘렸던 사람들과의 만남.

천년고도라고도 불리는 호남지역 복음의 산실, 전주 여행은 바로 그 사람들을 만나는 여정이다. 오늘의 여행은 전주천 동쪽과 서쪽을 이어주는 다가교 위에서 시작된다. 다가교 동쪽 정면에는 전라도 최초의 교회인 서문교회가 우뚝 서있고, 서쪽 언덕배기에는 신흥학교 기전학교 예수병원 등 1세기 전 파란 눈의 선교사들이 가난하고 복음에 무지한 이 땅의 백성들을 품어주던 따스한 공간들이 다정한 친구들처럼 어우러져 있다.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신흥학교 리차드슨관. 화재로 소실돼 현관 부분만 남았다.
먼저 다리 서쪽에서 처음 마주치는 다가공원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400년 역사를 가진 활쏘기 터 천양정을 지나면, 오랜 역사 속에서 전주 땅에 값진 행적을 남긴 수많은 이들의 공적비들을 볼 수 있다. 그 중 맨 오른편에 자리한 두 개의 비석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김인전, 배은희. 서문교회의 제2대, 3대 담임목사를 나란히 역임한 두 사람은 기미년 당시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애국지사이자, 유치원과 학교 등을 설립해 후세를 양성한 교육자였고, 각각 임시정부와 해방된 조국에서 맹활약한 명망 높은 정치인이기도 했다. 더불어 이곳 사람들의 뇌리에 그들은 아직도 목회자이자 위대한 스승으로 남아있다.

이제 다가공원에서 길을 건너 신흥학교로 찾아가보자. 신흥학교는 선교사들이 호남 땅에 세운 첫 번째 근대학교이자, 김인전 배은희 목사의 뒤를 따라 신앙의 후예, 애국혼의 열매들로 자라난 새싹들의 요람이었다. 지난 세기의 흔적들은 아직도 학교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스미스관과, 30년 전 아쉽게도 화재로 불타버리고 현관 기둥과 아치만 남은 리차드슨관에서 찾을 수 있다. 두 건물은 2005년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신흥학교를 빠져나오기 전 놓치지 말고 들러야 할 것이 정문 앞에 세워진 삼일운동기념비이다. 삼일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제의 탄압에 옥고를 치른 교사와 학생들을 기념하는 상징물이다. 전주를 여러 차례 답사하며 <전주 비빔밥과 성자이야기>라는 걸작을 내놓은 이덕주 감신대 교수는 90년대 후반 신흥학교를 둘러보며 ‘1만평 넘는 넓은 교정에 이들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기념물 하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고 토로한 바 있다.

같은 회한을 지역 목회자들과 성도, 학교 동문들도 공유하고 있었던가 보다. 이들은 힘을 모아 마침내 2000년 3월 1일에 신흥학교 입구와 전주지역 만세운동이 시작된 매곡교, 일명 싸전다리 부근에 각각 만세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늦게나마 선열들을 향한 추모의 마음을 정성껏 표한 바 있다.

신흥학교 바로 뒤편에 자리 잡았던 기전학교는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하고, 현재는 기전대학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정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는 동안, 한 오래된 비석에서 낯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한국명 인돈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휴 린턴과 그 아내이자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의 딸인 샬로테 린턴 선교사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신흥학교 기전학교, 그리고 군산의 영명학교 등의 교장을 역임하며 수많은 후학들을 이끌었고, 대전 한남대학교 설립에 일등공신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신흥학교와 기전학교가 해방 후 재건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노고 덕분이었다.

▲ 전주예수병원의 옛 건물인 엠마오사랑병원의 고풍스런 전경(좌)과 예수병원의학박물관에 전시된 마티 잉골드 선교사의 흉상.
기전학교에서 길을 되돌아 나와 신흥학교를 지나서면, 당초 기독간호사의 양성소로 출발해 지금은 어엿한 대학교로 성장한 예수대학교를 만난다. 그리고 바로 연이어 서원고개 꼭대기에 우뚝 서있는 예수병원이 나타난다. 초대 원장 마티 잉골드 선교사를 비롯해, 하위렴 구바울 변마지 설대위 등 영어 본명보다도 한국식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의료선교사들이 청춘의 열정을 불살라가며 지치고 병든 이 땅의 백성들을 위해 사랑의 의술을 펼친 터전이다.

 

예수병원의학박물관

그러나 옛 선교사들의 자취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다시 맞은편 다가공원 방향으로 길을 건너야 한다. 다가공원 쪽에도 본래 예수병원 건물이었던 엠마오사랑병원을 위시해, 예수병원의학박물관이 들어선 기독의학연구원, 선교사묘역, 한일여성복지관, 예수병원어린이집 등 수많은 기관과 유적들이 밀집해 있다.

특히 우리나라 민간 의료기관으로는 처음으로 정식 박물관에 등록된 예수병원의학박물관은 1백년 넘게 이 땅을 거쳐간 의료선교사들의 자취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보고이다. 전시실 입구에 놓인 마티 잉골드 선교사의 흉상을 비롯해, 수많은 기록과 연표들, 문화재급 가치를 인정받는 기록사진들, 그리고 근대문화유산 목록에 오른 방광내시경 요도확장기 등 의료용품들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지나칠 수 없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의학박물관 뒤편으로 난 작은 계단을 타고 산길을 오르면, 지금까지 들른 모든 곳의 경치가 한 눈에 내려다뵈는 양지 바른 동산 위 여남은 개의 무덤이 순례객들을 기다린다. 데이빗 랭킨, 해리슨 부인 등 이 땅을 사랑하고, 이 땅의 사람들을 아끼다가 자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놓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안장된 묘역이다. 서울 양화진이나 광주 양림동산처럼 잘 단장되어있지는 못하지만, 절로 숙연함이 배어나는 분위기만큼은 다른 두 곳과 여일하다.

특히 네 부자가 이 묘역에 함께 묻힌 전킨 선교사 가족의 사연을 알게 된다면 어느 누구라도 가슴 뭉클한 느낌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전킨, 한국명 전위렴 선교사는 군산선교의 개척자이자 열정적인 사역자였다. 건강이 악화되어 전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복음을 향한 불타는 헌신의 의지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선교부의 만류까지 뿌리치며 최후까지 방방곡곡 전도에 힘을 쏟던 그는 53세의 나이에 먼 타향에서 눈을 감는다.

그의 묘비 앞에 나란히 놓인 세 개의 작은 무덤의 주인들은 시드니, 프랜시스, 조지라는 이름을 가진 전킨 선교사의 세 아들이다. 인생의 꽃을 채 피워보지도 못하고 숨진 이들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셋이나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그 부모의 인생은 그저 불행이었고, 실패였던 것일까. 적어도 이 땅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기전학교는 바로 전킨이라는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기념한다는 뜻으로 명명한 것이고, 전주의 자랑인 한옥마을에도 동락원이라는 유명한 건물에 전킨기념관이라는 별칭이 붙어있다. 그들에게 사랑의 빚을 진 수많은 이들이 교회에서, 학교에서, 병원에서 그리고 사회 각계에서 고인의 신앙을 계승하며 지금도 복음의 릴레이를 이어가는 것이다.

 

‘호남모교회’ 서문교회

▲ ①전주서문교회의 자랑인 종각에는 100년 전의 자취가 서려있다.
②‘깡통교회’로 널리 알려진 전주안디옥교회 예배당.
③전주다가공원 입구에 세워진 김인전 배은희 목사의 공적비.
이제 순례의 종착지를 향해 다가교로 되돌아가자. 다가교를 건널 때, 그 옛날 신흥과 기전의 학생들이 서문교회 주일예배에 참석코자, 만세운동에 동참코자 다리 위에서 긴 행렬을 이루던 장관을 떠올린다면 당시의 웃음소리와 함성이 슬그머니 귀를 스칠지도 모른다.

다리를 건너 서문교회에 들어서면 호남의 모교회라는 자긍심이 우뚝 선 종각과 설립 50주년 당시 세운 기념비에서부터 느껴진다. 특히 전킨 선교사 별세 직후, 그의 신앙과 사역을 기리기 위해 세운 교회 종각은 100년 전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전주의 대표적인 기독교유적으로 손꼽힌다.

교회 내 100주년기념관 안에 설치된 역사자료실 또한 순례객들이 반드시 들려보아야 할 공간이다. 말을 타고, 배를 타고 호남 땅의 전도행전을 온 몸으로 써내려간 선교사들의 모습, 그들의 사랑을 젖줄로 삼아 무럭무럭 자랐던 어린 소년소녀들의 해맑은 표정을 바로 여기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명감에 충만하고, 행복에 겨운 그들의 눈망울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하나님나라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음을 마음 깊이 확신하게 된다.

 

더 둘러보아야 할 곳들

전주에는 주요 교회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순례코스가 만들어진다. 전주 땅에 처음으로 선교사가 정착한 동네인 은송리(현재의 완산동) 일대에는 완산교회, 남문교회 등 민족과 애환을 함께 해 온 유서 깊은 교회들이 적지 않다.

한국순례문화연구원은 김제 금산교회를 시작으로 청도리교회 중인교회 효자동교회 예수병원 신흥학교 서문교회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순례길’ 개신교 유적코스를 개발하기도 했다. 순례문화연구원의 도움을 받으면 각 유적지의 상세한 해설과 함께, 도보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다. (063)232-5000.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방문지가 ‘깡통교회’로 이름난 전주안디옥교회이다. 화려한 외양을 추구하는 대신 군대 막사를 연상케 하는 소박한 교회당을 오랜 세월 본당으로 사용하면서, 재정의 대부분을 선교사역에 집행하는 이 교회의 남다른 사연은 신앙 유무를 떠나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준다.

안디옥교회와 전주YMCA회관 사이에 있는 ‘최용성 주님모습갤러리’도 잠시 시간 내어 찾아가 볼만하다. 지역교회들을 순회하며 80여 차례에 이르는 성화전을 열면서, 기독문화계에 한 획을 긋고 있는 작가의 영성 깊은 작품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010-6611-8418.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