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에서] ‘보은’ 아닌 필연적 ‘사랑’
[객석에서] ‘보은’ 아닌 필연적 ‘사랑’
영화 〈블랙〉
  • 조준영 기자
  • 승인 2009.09.08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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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블랙〉의 한 장면.
인간의 감정선은 기적 앞에서 여지없이 폭발한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눈먼 자를 고치고, 혈루 근원을 마르게 하고,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 앞에서 수많은 이들은 함께 기뻐하고 울었을 것이다.

〈블랙〉(BLACK)은 침묵과 어둠의 세상에서 소리와 빛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기적의 이야기다. 익히 알고 있는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선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온통 어둠과 절망뿐인 여덟 살 소녀 미셸이 굳은 믿음과 열심으로 무장한 사하이 선생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는 과정의 감동은 식상함을 훌쩍 뛰어넘는다.

영화 곳곳에 심겨진 기독교적 가치관을 헤아려보는 것은 색다른 흥밋거리. 영화 초반, 사하이 선생은 어린 미셸 앞에서 “알파벳은 A.B.C.D.E로 시작하지만, 네가 배울 알파벳은 B.L.A.C.K로 시작한다”는 말로 가르침을 시작한다. 보이는 것이라곤 오로지 어둠뿐이고,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미셸이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은 당연한 이치. 이렇듯 선생은 미셸과의 교제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라는 깨우침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선생이 의미하는 구별은 열등적인 의미에서의 그것과 다르다. 밤이 영원한 밤일 수 없듯, 오히려 선생이 말한 블랙은 새벽 미명을 기다리는 기대에 차 있다. 미셸에게 세상의 온갖 단어를 다 가르치지만, 오직 ‘불가능’이란 단어를 가르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미셸이 처음 내뱉은 단어 또한 의미심장하다. 분수대에서 쏟아지는 물을 손으로 맞은 미셸은 처음으로 입을 뗀다. “워…터”(Water).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듯, 손끝으로 생생하게 느껴지는 물에서 미셸은 비로소 생명의 빛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감격은 열망으로 이어져, 꽃이며 나무며 세상 모든 것을 만지고 그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한 후 세상 모든 사물이 달라져보이듯, 빛을 체험한 미셸에게 세상은 절망이 아니라 빛이 선물한 완전하고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무엇보다 미셸과 사하이 선생과의 관계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그것과 닮아있다. 선생은 미셸에게 있어 자신이 마지막 구원자임을 설명하며, 자신을 믿고 따르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미셸이 온전히 선생을 신뢰하고 따르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아무도 믿지 않았던 찬란한 기적이 시작되었다.

영화 말미, 십 수 년 전 갑자기 미셸을 떠났던 사하이 선생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다시 나타난다. 백치에 가까운 선생에게 미셸은 자신이 배웠던 그대로 가르침을 시작한다. 먼저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남을 구원하는 삶을 살라는 성경의 가르침. 선생을 향한 미셸의 마음이 그랬듯, 그것은 단순한 보은(報恩)이 아닌 필연적인 사랑이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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