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에세이 펴낸 시각장애인 이재서 교수 / “장애가 오히려 기회이고 희망”
자전에세이 펴낸 시각장애인 이재서 교수 / “장애가 오히려 기회이고 희망”
38년간 쓴 점자 일기 책으로 묶어…한계 딛고 일어선 삶 감동적으로 그려
  • 김지홍
  • 승인 2005.04.1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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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내 몸에 장애가 있다는 것, 이것은 분명 ‘절망’이다. 아무리 눈을 떠도 막막한 어둠만이 내 앞에 펼쳐질 때 삶은 아무런 의미없는 것이 된다. 남은 길은 하나, 그것은 죽음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한계상황을 딛고 일어설 때 삶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시각장애인으로 미국에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아 총신대 교수가 되었고, 장애인 선교단체인 세계밀알연합회를 만든 이재서 교수(52)는 “장애가 오히려 기회이고 희망”이라고 말한다. 고난이 희망이고, 절망이 오히려 기회라는 절대적인 역설을 머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살아낸 그는 절망 속에 빠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또다른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아름다움은 마음의 눈으로 보인다.”
15세에 시력을 잃고 자살을 꿈꾸다가 총신대와 미국 필라델피아성서대, 템플대 대학원, 럿거스대 대학원을 거쳐 총신대 교수, 세계밀알연합회 회장,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상임공동대표가 되었고, 지난해에는 국민훈장 목련장까지 받은 이 교수가 그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춥고 고통스러웠지만, 가슴벅차고 아름다웠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담담하게 정리했다.
<아름다움은 마음의 눈으로 보인다>(중앙일보 시사미디어).
그의 삶이 그러했지만, 그의 책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놀라운 ‘이적’을 만들어냈다. 38년간 점자로 차곡차곡 쌓아왔던 그의 일기를 정리해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두명의 새로운 신앙인이 탄생했다. 책을 낸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김진용 대표는 4월 14일 숭실대 한경직기념관에서 가진 출판기념회에서 놀라운 선언을 했다. 이 교수의 원고를 읽으며 많이 울었고, 이제 자신도 신앙을 갖겠다고 말한 것. 출판 실무를 담당했던 부장 역시 교회에 대한 오해를 씻고 다시 교회에 나가겠다고 고백했다.
4월 20일은 제25회 장애인의 날이다. 수많은 기념일 가운데 하나로 빛이 바랜 것처럼 느껴졌던 이 날은 이제 그의 이야기들로 인해 생생한 빛을 발한다. 그 빛은 성실한 한 인간의 궤적이 갖는 아름다움이고, 고통 속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신앙심으로 그 모든 난관을 뚫고 일어선 한 인간의 용기와 의지가 갖는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는다.

<발췌된 문장으로 읽는 에세이 - “내게 남아있는 1%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 1965년 겨울부터 자꾸 눈이 침침해졌다. 멀리 있는 물건이 잘 안 보이고 눈앞에 있는 물건도 뿌옇게 보였다. 두세 달 사이에 눈이 현저하게 나빠졌다. 서울 종로 무교동에 있는 공안과에서 수술을 받고 두 달 동안 입원했다. 형은 병실에 함께 기거하며 나를 돌봤다. 안대로 가리고 있는데도 답답하지 않았다. 서울에 와서 수술까지 했으니 곧 눈이 보일 것이라는 희망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 1966년 9월, 드디어 안대를 푸는 날이 되었다. 이제 안대만 풀면 모든 것이 잘 보일 것이라는 희망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의사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안대를 풀었다. “보이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병원을 나올 때 나는 마치 몸에서 의식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몸만 휘청휘청 걸어가고 있을 뿐, 나는 거의 의식이 없었다. 형이 나를 붙들고 나오는데, 내가 걷는 것인지 날아가는 것인지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이제 세상은 끝났다.”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 나는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억울하게 사형 판결을 받은 사형수가 독방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심정과 다름없었다. 다만 죽을 날짜를 내가 정한다는 것이 사형수와 달랐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죽을 궁리만 하고 있으니 서서히 정신분열이 일어났다. 가끔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조금씩 미쳐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보이지 않는데 더 이상 무슨 희망을 갖겠는가!
- 학교에서는 이따금 외부에서 강사를 초청하여 교양 강좌를 듣게 하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내가 아직 좌절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학교에서는 어떤 목사님을 초청하여 우리에게 좋은 말씀을 듣게 했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앉아 목사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뜻밖에 나는 그날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 목사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눈이 있습니다. 사물을 보는 육안, 지혜를 터득하여 가지는 지안, 마음으로 보는 심안, 그리고 하나님을 보고 영원한 세상을 보는 영안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 어떤 사람도 이 네 가지 눈을 완전히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 한 가지씩 눈이 부족한 시각장애인인 셈입니다. 여러분만 시각장애인이 아닙니다. 육안 하나를 잃은 것 때문에 자신만 장애인이라는 생각으로 비관하고 좌절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 길에서 도움을 부탁할 때 사람들의 태도는 다양했다. 손을 잡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대개 우산이나 신문을 접어 내밀며 잡고 따라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앞에서 구두 소리를 똑똑 내면서 “여기로, 여기로”라며 강아지를 부르듯 한다. 그럴 때는 도움을 받으면서도 모욕스러웠다. 더욱 황당한 것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가 버리는 것이었다.
- 얼마 뒤에는 그 내자아파트 건널목에서 사고를 당했다. 그날도 비가 왔는데 많이 망설이다 그냥 혼자 한번 건너보기로 했다. 중간쯤 건너다 버스에 눈 윗부분을 부딪쳐 쓰러지고 말았다. 안경도 깨지고 피도 많이 났지만 버스는 그냥 가 버렸다. 만일 1cm만 몸이 앞으로 더 나갔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었다. 쉽게 일어나지 못했지만 마침 다른 차가 없어 더 큰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
- 병원 응급실에서 돌아와 그날 밤 나는 많이 울었다. 다친 머리도 아프고, 마음도 아파서였다. 그러나 다음날 나는 머리에 큰 붕대를 감은 채 다시 학원으로 갔다.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를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나중에 국문과에 진학하여 훌륭한 작가가 되면 이 모든 고생은 보상받는다는 생각을 했다.
-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인데다 남에게 부탁하려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기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마음을 굳게 먹지만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입이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세 시간 넘게 한 자루도 팔지 못했다. 점심까지 굶고 서 있자니 탈진할 것만 같았다. 갑자기 오기가 발동하여 나도 모르게 다가오는 사람에게 말했다. “저, 시각장애인 학생인데요, 볼펜 한 자루만 사 주세요.” 그러나 그 사람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 저녁 6시까지 목이 아프게 볼펜을 사 달라고 외쳤지만 단 한 자루도 사 주는 사람이 없었다.
- 나는 1973년 5월 31일부터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 집회에 우연히 참석했다. 대학 포기 이후, 진로 문제 고민 등 매우 침체된 때였다. 본래 나는 따지기 좋아하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말은 쉽게 수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 메시지를 들을 때 마음속에서 감동이 마구 밀려왔다. 이상하게 마음이 뜨겁고 희열이 넘쳐났다. 몇 년 동안 이 종교, 저 종교를 기웃거리며 갈등하고 도전했던 것이 거기서 무너져 내렸다. 마음속에 감동이 일면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나는 내게 남아 있는 1%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너무 작아 보이지도 않던 것,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겼고,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그 1%의 존재를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 1% 속에는 많은 것이 있었다. 그것이 그렇게 많은 것인 줄 전에는 전혀 몰랐다. 두 팔과 다리, 생각할 수 있는 머리, 부모 형제, 친구들, 초.중.고 학력, 책을 좋아하는 습관, 서툴지만 글도 쓸 수 있고… 그러고 보니 너무 많은 것이 그 속에 있었다.
- 성경을 공부하면서 어느덧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치의 기준이 바뀌어 있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졌고, 그들에게 참 진리를 말해 주는 일이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어느 틈엔가 내 마음속에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없었다. 신춘문예에 응모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글을 썼던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정말 굉장한 변화였다. 대신 장애인 선교 쪽으로 기도가 깊어지고 관심이 집중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 9월 27일 여섯 명이 창립 준비모임을 가진 다음 드디어 1979년 10월 16일, 역사적인 한국밀알선교단 창립식을 거행했다. 창립식은 화요일 저녁, 상도동 연합세계선교회 사택 거실에서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바로 이날을 위해 그동안의 나의 삶은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모든 시련과 아픔이 바로 이날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실명, 서울맹학교, 하나님과의 만남, 순천성경학교, 총신대, 대흥제일교회, 성광원, 그리고 형,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여기로 오는 길이었다. 하나도 없어서는 안되는 빈틈없이 짜인 질긴 길이었다. 그 모든 것이 아팠던 이유는 생명을 낳기 위한 산고였다.
- 1996년 3월, 마침내 나는 정식으로 총신대 교수가 되었다. 학위를 받고 귀국한 지 1년 반 만이었다. 소속은 신학과이고 실천신학 분야와 사회과학 관련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4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처음으로 월급이라는 것을 받는 직장인이 된 것이다. 대학 교수라는 것이 어떤 자리인가! 너무 감사했다. 형님도, 아내도 기뻐했다. 그때까지 살아 계셨던 아버지도 좋아하셨다.
- 이 부족한 책이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은 용기와 위로라도 되기를 기도한다. 나는 그분들께 말하고 싶다. 고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아픔이지만 창조를 위한 기회라는 것을. 고난은 언제나 설명서 없이 찾아온다. 설명서는 언제나 나중에 온다. 고난은 이메일로 오지만, 그에 대한 설명서는 배를 타고 온다. 그 고난을 끝으로 알고 쉽게 행동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인정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무조건 참아야 한다. 무조건 인내해야 한다. 끝까지 견뎌야 한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아직 남은 부분을 붙들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기쁨과 감사로 그 설명서를 받아 읽을 날이 있을 것이다.
(사진설명: 이재서 박사의 메시지는 다름아닌 ‘희망의 노래’이다. 그 희망은 그가 장애와 질곡의 긴 터널에서 건져올린 역설적 진실이다. 그의 장애가 오히려 비장애인들에게 용기와 위로의 전언이 되고 있다. /사진=권남덕 기자 photo@kid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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