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신 목사, 신뢰의 20년 사역 마치고 조기은퇴
‘이웃과 세계 품는 공동체’ 비전과 다짐 계속된다

고별설교를 마친 김익신 목사가 후임 이진 목사와 나란히 강단에 올라 교우들을 축복하는 모습.
고별설교를 마친 김익신 목사가 후임 이진 목사와 나란히 강단에 올라 교우들을 축복하는 모습.

“유감스럽게도 췌장암 판정이 나왔습니다.”

병원에서 날아온 문자를 확인하며 익산 북일교회 김익신 목사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큰 충격 앞에서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보려 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할 일을 이제 다 시키셨나보다.’

이웃과 세계를 품는 공동체가 되자는 다짐을 담은 북일교회당 꼭대기의 등대 조형물.

그 날 오후 병원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같은 시각에 검진을 받은 동갑내기 다른 환자의 결과를 착오로 인해 잘못 보낸 것이란 내용이었다. 김 목사의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3년 전의 그 해프닝은 사실상 제 인생을 정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이미 ‘나는 원 없이 목회했다. 여한이 없다. 그러니 아무도 슬퍼하지 마라’고 당부해둔 터라 목회 마무리가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해 3월 24일 이리노회로부터 북일교회 당회장 사임 허락을 받은 김익신 목사는 바로 다음날 익산을 떠나 경기도 양주로 이사했다. 북일교회에 부임한 게 2001년 2월의 일이니 만으로 정확하게 20년을 채운 것이다.

북일교회 히람선교단이 농촌교회를 도와 건축봉사를 하고 있다.
북일교회 히람선교단이 농촌교회를 도와 건축봉사를 하고 있다.

부임 당시 북일교회는 혼돈과 침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긴 내분으로 방황을 거듭해온 어수선한 분위기부터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김 목사에게 주어져 있었다.

김 목사에게는 신앙적인 강직함과 쾌활한 리더십이 존재했다. 부친 김치한 목사에게 물려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체득한 부분이 컸다. 신학교 재학 시절 사명보다는 이익을 탐하는 사역자들을 목격하고서는 스스로 학업을 중단한 일이며, 친구의 설득으로 다시 학업을 마치고서는 낙도와 농촌을 주로 돌며 충직하게 목회현장을 지켜왔다.

은퇴를 앞두고 자신이 섬겨온 북일교회 상징탑 앞에선 김익신 목사. 교우들과 행복했던 20년간의 동행을 마무리하는 데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은퇴를 앞두고 자신이 섬겨온 북일교회 상징탑 앞에선 김익신 목사. 교우들과 행복했던 20년간의 동행을 마무리하는 데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북일교회라는 새로운 사역지에서 그의 성품과 은사들은 한껏 만개했다. 지시하고 훈계하는 자리에만 있지 않고, 기꺼이 성도들과 현장에서 머리를 맞대며 땀 흘리고 뒹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성도들 또한 사심 없이 복음과 선교만을 생각하는 새 담임목사를 진심으로 따랐다. 한 마디로 서로의 합이 잘 맞았다.

지역의 어르신들을 돌보는 노인대학 개설과 재가노인복지사역을 시작으로 문화센터와 스포츠동호회처럼 이웃들과 함께 하는 여러 사역들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주민들과 교회 안팎의 여러 소식을 공유하는 소식지도 창간했다.

부임한지 3년도 안 돼 북일교회는 완전히 다른 공동체로 변신해있었다. 지역사회에 좋은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새 가족이 등록했고, 급기야 공간이 부족해 새 예배당을 세워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수여한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교회상’은 온 교회에 큰 기쁨과 격려가 됐다.

건축봉사를 위주로 하는 히람선교단과, 여성 교인들이 중심이 된 이미용선교단은 ‘예수 심장으로 이웃과 세계를 품는 북일교회’라는 영구 표어를 구현하는 정점에 선 조직이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곳이면 국내 어디라도 심지어 해외에까지 달려가 며칠씩 현지에서 기거하며 불편한 환경에서도 섬김의 헌신을 아낌없이 바쳤다. 물론 김익신 목사도 그 현장에 언제나 함께였다.

하지만 김익신 목사와 북일교회 성도들의 비전은 처음부터 내 교회 잘 되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웃교회들과 연대에 힘쓰고, 군선교연합회 성시화운동 결식아동지원센터 장기기증운동본부 등 자신들이 지닌 자원을 필요로 하는 연합사역에는 늘 앞장서 힘을 보탰다.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속삭인 말이 있다고 해요, ‘우리 목사님은 북일교회만의 목사님이 아니다’라고요. 다들 그렇게 너그러이 이해해주고, 뒷받침해준 덕분에 제가 행복하게 목회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물러난 후에도 북일교회가 여태 해온 것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는 교회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김익신 목사와 북일교회 성도들이 공명선거 캠페인을 펼치는 중이다.
김익신 목사와 북일교회 성도들이 공명선거 캠페인을 펼치는 중이다.

그렇게 교계에서 깊은 신망을 쌓았지만 김 목사는 교단정치와는 항상 거리를 두고 살았다. 노회장과 서기를 지내며 총회총대로 3번 참석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면서도 총회군선교위원회 지회장과 전북신학교 부학장 및 <기독신문> 논설위원 등으로 자기 몫의 책임은 다하려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보니 어느새 은퇴를 생각할 시기가 눈앞으로 부쩍 다가왔다.

3년 전 병원에서 날아왔던 착오문자 사건은 김 목사가 조기 은퇴를 결심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일찌감치 은퇴 결심을 교회에 선포하고, 후임자를 선정해 동사목회를 하는 기간도 아쉬움 하나 없이 보낼 수 있었다.

4월 17일 북일교회는 이리노회 동역자들이 함께 한 가운데 김익신 목사의 원로목사 추대식을 거행했다. 20년간의 행복한 동행을 마치고 정든 목회지를 떠난 후, 김 목사는 남은 힘을 해외 선교지를 돌보고 현지인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데 보탤 계획이다.

광주동명교회에서 사역하다 후임으로 부임한 이진 목사는 “북일교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고 기도해주신 김익신 목사님과 온 교우들에게 감사드립니다”라면서 “더욱 새벽을 깨우고, 목양일념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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