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보수신앙 정체성 사수하며 교단과 교회 부흥 이끌다

 

정규오(丁奎五·1914∼2006)

‘바른 신앙, 넓은 시야의 지도자’ ‘아름다운 원칙주의자’로 표현되는 해원 정규오 목사의 업적은 크게 3가지 분야로 평가할 수 있다.

첫째, 신학과 신앙 분야 업적으로 ‘51인 신앙동지회’ 결성과 자유주의신학 퇴치운동을 들 수 있다, 조선신학교가 자유주의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그냥 묵과할 수 없었던 정규오는 정통신학을 사랑하는 51인 동지들을 규합하여 제3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진정서(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총회는 51인 학생들의 진정서가 이유 있다고 보고 조사위원을 내서 총회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을 타파하는 데 힘썼다. 또한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신앙동지회를 중심으로 1953년 7월 한국 NAE를 결성했다.

둘째, 교회 정치 및 행정 분야에서 가장 주목할 것이 ‘합동총회와 개혁총회의 재합동’에 있어서 중심역할을 한 일이다. 해원은 개혁총회가 합동총회로부터 분리하여 나온 26년 후 합동총회와 재합동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이것이 해원의 생전에 한국교회와 세계 교계에 귀감이 되는 마지막 공헌이다. 

셋째, 교육 분야에서는 개혁주의 신학을 보수하기 위해 장로회신학교 설립에 공헌했다. 박형룡을 교장으로 하는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하는 데 학우회장 해원을 중심으로 한 학우들과 51인 신앙동지회가 주축을 이루었다. 또한 광신대학교를 설립하여 지역 특성에 맞는 인재를 양성하기도 했다.

발제자/김호욱 교수(광신대학교

 

이영수(李榮壽·1928~1987)

1968년 제53회 총회에서 총회회관 건립안이 제안되고, 결의를 얻어 총회회관 건축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건축위원이었던 이영수 목사는 재단법인 합동유지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81년 8월에 허허벌판이었던 강남구 대치동 산36-4번지에 560여 평의 현 총회회관 부지의 매입을 주도했다.

당시 반대하는 편에서는 그의 독단적이고 무모한 사업계획과 추진을 우려하는 동시에, 소위 ‘이영수 회관’을 짓는다고 하며 재정적 도움을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나 대치동 부지를 매입하면서 이영수는 이곳이 미래에 서울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마침내 1981년 9월 18일 지상 10층, 지하 2층으로 연건평 2262평의 공사를 시작하며 총회회관 기공예배를 드렸다. 총회회관 건립을 새로운 부흥과 발전의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총신대학교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1980년 제65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며 그는 총신 분교를 세울 것을 계획하고 부지를 물색했다. 1981년 3월 13일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제일리 산 41-1번지 소재 22만 4329평의 임야 매매 계약을 정식 체결했다. 2년 후 총신 양지캠퍼스 제1교사가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연건평 1470평의 규모로 준공됐다. 현재 양지캠퍼스 재산 가치는 1000억 원이 넘는다.

일만교회운동은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복음을 전파함으로 교단 교세를 부흥시키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다. 이영수는 기획실장을 맡아 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운동 시작 당시인 1975년 총회 교세는 약 2000여 교회에 불과했는데, 9차 년도인 1984년에는 4468개 교회로 늘어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발제자/김병희 교수(대신대학교)

 

이환수(李煥秀·1909∼1985)

이환수는 1938년 황해노회의 추천을 받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해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다. 이후 이환수는 요시찰인물로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눈총을 받는다.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7명의 목사가 수배되었고, 이들 중 주동자로 지목된 이환수는 교회를 떠나 몸을 피해야 했다.

해방 후 이북이 공산화가 되자 월남 후 서울 청파동에서 ‘덕영학사’를 설치하여 황해도 출신 학생들과 피난민을 돌보는 사역을 하였고, 6.25 전쟁 직전까지 소년원을 운영하였다. 또한 박형룡 박사, 이인식 목사, 감창덕 목사 등과 논의하고 황해동우회의 지원을 받아 1948년 청암교회를 설립하고 담임목사가 됐다. 설립 취지 중 하나는 신신학운동에 맞서 정통신앙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1958년 경기노회장으로 봉사하는 중 제44회 총회에서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당시 이환수는 복음주의선교협회(NAE) 회장으로 과거 51인 신앙동지회 회원들과 함께 성경적 보수신앙을 사수한다. 1962년에는 제47회 총회장으로 사역을 감당한다. 

이렇게 그는 총회의 신학적 노선과 정치적 합법성을 지키면서 신앙적 영성의 기틀을 세운 인물이었다.

발제자/장영학 목사(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관장)

 

박찬목(朴燦穆·1915~1979)

박찬목 목사가 태어나 성장한 황해도 안악은 민족운동의 본산지라 할 만큼 일제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안악사건과 소위 105인 사건이다. 박찬목도 일제강점기인 1941년 9월 사리원경찰서에 구금되는데, 일본에 대한 비판적 내용의 설교가 원인이었다.

해방 후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안악군 대금교회 목사로 시무하는데, 공산단의 탄압으로 1947년 2월 해주보안서에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른 것이다. 바른 신앙과 기독교의 본질을 지키려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훗날 자유주의신학을 반대하는 일에 앞장을 선 것도 이러한 일에 연유한다.

박찬목은 월남 후 1949년 10월 30일 광주중앙교회로 목회지를 옮긴다. 당시 광주중앙교회는 소위 신신학의 조류가 밀어닥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박 목사는 정통신학과 신앙을 가르치며 교인들에게 잘못 인식한 교리들을 깨닫게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전남지역에 보수신앙을 수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서울로 임지를 옮겨 염광교회, 혜성교회 등에서 사역했다.

박찬목의 인생에 있어서 주목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한평생 보수신앙 수호자로서 헌신하였다는 점이다. 1959년 WCC 신학 문제로 통합 측이 이탈해 나갈 즈음에 총회 서기직을 맡아, 총회의 정통성을 파수하고 이를 계승하려는 노력의 중심에 거목으로 항상 서있었다. 그래서 ‘보수교회의 국방장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제38회 총회 회록서기를 시작으로 제51회 총회장까지 총 11회기에 걸쳐 총회 임원으로 본 교단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했다.

발제자/김남식 박사(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임승원

1960년대 말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는 당시 교육담당이던 임승원 목사에게 ‘교회교육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주일학교 공과임을 임 목사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김창인 목사는 그것을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으냐고 물었고, “재정만 있으면 할 수 있다”고 하자 쾌히 승낙해 일사천리로 진행하게 됐다.

일이 급진전하여 1차 년도에 유년부와 초등부 공과가 출간케 되자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새 공과는 차원이 다른 것임을 감지한 당국자들은 당시 총회 교육부장이던 박찬목 목사를 동원하여 총회에 헌납하도록 종용했다. 이렇게 하여 최초의 계단공과가 발행됐고, 이후 6년에 걸쳐사 유년부에서 고등부까지 완관되었다. 전해진 바로는 새 총회회관 건축비로 계단공과 판매 이익금이 한몫을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후 이권다툼이 일어나 첫 계단공과는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총회 결의에 의하여 임승원 목사에게 실무총책을 맡기어 약 10년에 걸쳐서 유아부부터 소망부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공과를 완간하여 현재 사용하고 있다. 공과 서문에는 집필 총 책임과 감수를 담당한 임승원 목사에게 감사를 전하고 있다.

임승원 목사는 진전되지 못하던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 책임을 맡아 4년간의 노력 끝에 완간에 성공하기도 했다. 또한 교육현장에 직접 도움이 되는 월간 <교사의 벗> 발간에 나서 1985년 교통사고를 당하기까지 15년 동안 헌신했으며, 사고 후에도 기독교교육을 위한 활동에는 적극 응했다. 한국교회 교육은 그에 의해 크게 발전했다고 본다.

발제자/정성구 박사(한국칼빈주의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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