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웅 선교사(의정부 태국인 펠로우십교회)

“숨을 쉴 수 없다.” 이 말은 지난해 5월 25일 미국 미네스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 위조지폐 사용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용의자인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체포 후 8분 46초 동안 무릎으로 목을 눌러 사망하게 된 과정에서 나온 조지 플로이드의 외침이었다. 경찰의 목 누르기 장면을 담은 영상이 퍼지면서 과잉 진압과 인종차별 논란이 커졌고 세계 각국에서 조지 플로이드에 대한 추모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급기야 약탈, 방화, 폭행을 동반한 폭동도 벌어졌고 경찰도 강경진압하면서 사태가 악화되었다.

거기에다가 작년부터 전 세계로 퍼지고 있는 코로나19 사태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되었고, 미국 트럼프 전 대통령이 중국의 우한바이러스연구소에서 발원했다는 증거를 보았다는 유언비어로 중국인 혐오를 넘어 아시아인 혐오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재난이 있을 때에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아시아계를 향한 증오범죄까지 초래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저출산, 고령화와 제조업의 환경 변화로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와 있다. 현재 국내 거주 외국인은 250만명으로 추산된다.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은 미처 준비할 시간도 없이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해외로 단기선교를 나갈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많은 한국교회가 국내 이주민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수준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시혜적 단계에 머물고 있다.

비록 이들이 여러 도움이 필요하여 교회에 발을 내딛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적어도 이들과 파트너라는 동반자 인식이 필요하다. 우리도 과거에 독일 광부, 간호사 등으로 이들과 비슷한 처지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며 이들을 환대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노동비자로 들어온 이들에게 가족 동반을 허락하지 않는 구조 자체가 이들을 약자의 환경으로 몰아간다. 그런데 이러한 열악한 환경이 그들의 나라에 있을 때보다 복음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게 한다. 지금 선교의 흐름은 초기의 해안선 선교에서 내지선교 그리고 미전도종족선교에서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의 선교로 바뀌고 있다. 자국을 떠나 타국에 있는 나그네들이 마음이 가난하게 되고 복음에 호의적이 된다.

해외에 가야만 선교를 한다는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 가까이에 와 있는 외국인들이야말로 중요한 선교의 대상이다. 우리나라에 산지 10년이 넘었어도 한 번도 한국인 가정에 가본 적이 없다는 외국인들이 태반이다. 직접 전도도 필요하지만 이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와 부드러운 미소 자체만으로도 ‘한국인은 무뚝뚝하고 거칠다’는 편견을 제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과 접촉하셨고 유대인들에게 혐오 대상이었던 세리 마태를 기꺼이 제자로 받아들였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배제와 포용’에서 “타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무죄한 사람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들이 악을 행하는 사람임을 알 때조차도 그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교육관을 빌려주던 어느 한국교회가 코로나 방역으로 거리두기가 필요하니 기꺼이 본당을 내어주며 사용하게 하는 것도 포용의 표현이다. 코로나19 사태를 핑계로 모임을 중지시킬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화평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육체로 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게 한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엡 2:14~16)인데 이제 우리가 가까이에 와 있는 이방인인 외국인 나그네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감당할 기회가 왔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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