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에 충실했던 헌신의 목회자, 교단 세우고 개혁신학 지켰다

명신홍(明信弘·1905~1975)

명신홍은 네 가지 면에서 사표(師表)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첫째, 훌륭한 목회자였다. 목회사역에 있어서 항상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희생적인 목회를 하였다. 둘째로, 훌륭한 교회 행정가였다. 제38회 총회장으로서 총회를 평화스럽게 잘 지도하여 모든 면에서 원만하게 이끌어갔다. 셋째로, 훌륭한 교육자였다. 장로회 총회신학교 교수로서, 총회신학교 교장으로서 총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그의 공은 널리 알려졌다. 넷째로, 탁월한 설교가였다. 분명하게 정립된 개혁주의 신앙과 윤리관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논리와 질서정연한 탁월함을 소유한 시대의 설교가였다.

그는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총회신학교를 세우는 데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대장암 수술을 수차례 받고, 인공 항문을 찬 채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개혁파교회(C.R.C)를 찾아가 천신만고 끝에 3만 불을 모금하여 오늘의 사당동 총신대를 건립하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하였다. 이 후원금을 기초로 하여 총회 각 산하 교회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본관 건물을 건축하게 되었다.

당시에 사당동 총신대 건물은 폐허 같은 곳이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어도 해내기 힘든 일을 그는 해냈다. 게다가 돈을 아끼기 위해 주변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대신 배로 귀국을 했다. 항해하는 동안에도 대장에서 출혈이 생겨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면서 돌아왔다. 누가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 신학교를 건축하기 위해 명신홍처럼 할 수 있겠는가? 

발제자/정성구 박사(한국칼빈주의연구원 원장)
 

이대영(李大榮·1887~1968)

이대영 목사는 한국교회사에 큰 흔적을 남겼다. 1921년 안동교회 당회록을 살펴보면, 조선 최초의 기독청년면려회(CE)가 출범하는 현장에서 이대영이 당회장으로서 그 모임에 참여하여 기도함으로 정식 발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경안노회 최초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1921년 총회 전도부에서 선교사로 임명받고, 1922년 6월 중국에 선교사로 부임해 약 26년간 사역하며 산동성 지역 복음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그는 중국선교에 헌신할 각오를 하였기에 중국교회로 이명까지 했다.

1948년 일시 귀국하여 선교보고를 하던 중, 중국 내부 형편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기다리다 결국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954년 승동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하였다. 승동교회에서의 그의 목회철학은 성경에 근거한 ‘하나님 중심’ 신학이었으며, 특별히 ‘주일성수’가 목표였다.

1956년 제41회 총회에서 그는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이미 에큐메니칼 자유주의를 따르는 무리가 세력화를 하면서 활동하는 상황에서 총회장으로서 정통보수신학과 신앙을 사수하기 위한 중요한 안건들을 처리하였다.

특히 자신이 담임하고 있었던 승동교회에서 1959년 11월 24일 44회 속회 총회 장소를 제공하여 합법적 총회의 속회와 함께 본 교단의 단결과 화합을 꾀하였다.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에 정통보수신학과 신앙을 기초로 본 교단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데 그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였다.

발제자/장영학 목사(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관장)
 

김윤찬(金允燦·1905~1993)

김윤찬 목사는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이에 반대하며 ‘신앙의 비밀 결사’ 조직을 만들었고, 설교에서 일제 신사참배를 죄라고 설교했다. 1944년 4월에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 경찰을 피해 황해도 곡산의 언진산 동굴에 피신해 숨어 지냈다.

1945년 7월 평양 연화동교회로 옮겨 시무하던 중 해방이 왔으나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했다. 이때 김윤찬은 북한 공산당이 그를 초청하는 일체의 행사에 참석하거나 협력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공산 치하 5년 동안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6·25 발발 후 부산으로 내려와 설립한 평양교회에서 1000여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하던 중에 서울이 수복되자 교인들도 상경했고, 마침내 서울에서 ‘평안교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다. 

총회가 연동 측(현재 예장통합)과 분리할 때는 미국에서 강사를 초청하여 WCC의 실체를 알리는 전국 순회강연회를 개최하고 준비위원장으로 활약했다. 당시 재산이 연동 측에 다 넘어간 상황에서 김윤찬은 미국 페이스신학교 총장 매킨타이어 박사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이를 통해 받은 지원금으로 용산에 신학교 건물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용산 신학교는 오늘날 총신의 전신이 되었다.

또한 1965년 1월 4일에 본 교단 기관지로 ‘개혁신앙의 보수’를 표방하며 <기독신보>(현 <기독신문>)가 출범할 때 초대이사장을 맡았으며, 칼빈신학교(현 칼빈대학교)를 설립해 후진양성에 힘썼다.

발제자/신종철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
 

박종삼(朴種森·1931∼1987)

박종삼 목사의 이름은 제33회 총회에 51인 신앙동지회가 조선신학교 교수 김재준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할 때 그 일원으로 등장한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박종삼 목사는 51인 회원들 중에 경북노회의 소속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고, 마침 제33회 총회가 대구제일교회당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이들 대표들은 모두 대구 반월당에 위치한 박종삼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고 한다.

조선신학교 제6회 졸업생으로 당시 51인 중 가장 선임이었고, 연장자였던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하지 않았고, 선배로서 동지들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면서까지 최선을 다했다.

1954년 3월 광주 양림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면서 광주신학교(현 광신대학교) 제3대 교장과 제3대 이사장으로 각각 봉직했다. 1964년부터는 광주 숭일고등학교 교목으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제자들에게는 사랑과 섬김의 본이 되기도 했다.

총회장 소강석 목사는 스승 박 목사에 대해 “신학교 시절, 돈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하였는데 목사님께서는 용돈을 주실 뿐만 아니라 소고기국을 끓일 때마다 사택으로 부르셨다”고 말하면서 “이분의 사랑과 섬김의 실천을 배우지 않았다면 나는 아슬아슬한 정치 목회의 데드라인에 서서 방랑하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회상한다.

그는 전력을 다해 보수신학을 지키며 그 소중함을 체득했으며, 그 신학을 후학들에게 계승하며 확고한 신앙관을 표출했다.

발제자/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차남진(車南珍·1915~1979)

차남진은 1960년대 총회신학교에 재학했던 후학들에게 위대한 스승이고, 설교가요, 부흥사요, 전도자요, 목회자요, 눈물 많은 사랑의 실천가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할 당시, 전주신흥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차남진은 신사참배 문제로 자퇴했다가, 이듬해인 1938년 2월 일경에 갑자기 체포되었다.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수감 중에 늑막염을 얻어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나, 구사일생으로 만기 출옥할 수 있었다.

51인 신앙동지회가 총회에 김재준 등의 신학에 대해 진정서를 제출하였을 때, 차남진은 10명의 학생대표 중 한 사람으로 연구부장을 맡았다. 나중에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1961년부터는 총회신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의 사역에서 독특한 부분은 전도사역이다. 대표적인 사역이 사형수들을 향한 전도의 열정이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6명의 가족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 고재봉을 전도하여 구원을 받게 한 일이다. 그에게는 ‘사형수의 전도자’라는 별칭이 붙었다. 또한 움막에서 살던 내곡동 한센환자들을 위해 양계장을 조성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헌인교회’를 개척하였다.

1969년 총회신학교를 사직한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미주선교사’로 임명됐다. 이 직책은 명예직이었기에 생활비나 활동비를 지불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운전하고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신학자이며 동시 최초의 사회적인 활동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발제자/한기승 목사(광주중앙교회)

정리=정재영 기자 jyjung@kidok.com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