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의 섬마을 순례]

볼음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서도면에 위치한다. 면적은 6.36㎢, 섬 둘레는 16km이다. 산 높이는 북쪽 봉화산이 83m, 서북쪽 요옥산이 103m로 대체로 낮은 편이다. 총 140가구에 인구 240명이 산다.

볼음도라는 지명은 앞서 주문도의 경우처럼 조선시대 임경업 장군의 일화에서 유래했다. 조선 인조 때 임경업 장군이 풍선을 타고 명나라에 원병수신사로 출국하던 중, 이 섬 부근에서 풍랑을 만난다. 이때 피신하여 섬에서 15일간 체류하다가 둥근달(보름달)을 보았다하여 원래는 만월도(滿月島)라고 불렸다. 그 후 우리말인 ‘보름’의 발음을 따라 한자화가 이루어져, 현재와 같은 볼음도가 되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설도 있다. 해방 전에 볼음도는 교동도처럼 황해도 연백이나 인천 등지와 자주 교류했다. 육지에서 풍선을 타고 나가면 안개가 자주 끼고 일기가 불순하여, 보통 보름 정도 섬에 머물러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래저래 ‘보름도’는 볼음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볼음도는 강화도, 석모도, 교동도 등에 가려서 사람들이 잘 모르고, 찾지 않는 조그만 섬이다. 게다가 민통선 지역이라 검문검색이 심하다. 여객선에 승선할 때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하고, 섬에 도착해도 해병대원들이 방문자 신분을 확인하며 이름과 연락처를 적는다. 연백군과 불과 5.5㎞ 떨어진 서해 최북단의 섬이라, 해안선을 따라서 걷다보면 북한 땅이 지척으로 보인다.

볼음도에 오면 반드시 해봐야 할 일이 갯벌체험이다. 조개골해수욕장에서 조금 더 가면 영뜰해변이 나온다. 영뜰해변에서는 물이 빠지면 개매기 체험을 할 수 있는데, 옹골찬 갯벌 위로 여러 대의 경운기가 달려가기 시작한다. 이 경운기로 한참을 타고 멀리 바다 쪽에 다다르면 고기와 바지락을 잡는 체험을 하게 된다.

갯벌의 길이가 무려 6㎞에 이르는데다, 고급조개인 상합(대한)과 모시조개(일명 가무락) 등을 채취할 수 있어 인기가 높다. 특히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7~8 물(음력 15일과 30일) 때에 갯벌 끝으로 가면 1개에 200g 정도 되는 큰 백합도 잡을 수 있다.

볼음도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마을을 예전에는 죽하촌(竹下村)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볼음도에는 외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요망장과 군사 10명이 주둔했으며, 군사들이 근무하는 망대가 바로 이 마을에 있었다. 그래서 ‘대아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망대의 ‘대’(臺) 자가 대나무 ‘죽’(竹) 자로 바뀌면서 죽하촌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이 동네에 볼음교회가 있는데, 설립일이 1903년 3월이니 역사가 무려 118년이 되었다. 본디 어업이 주를 이루는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볼음도에는 우상숭배가 심했다. 섬의 중심지 역할을 한 당하촌(堂下村)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신당이 세워진 당산 아래 마을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것으로 ‘당아래’라고도 불렀다. 당시에는 신당에서 작두를 타며 신명나게 흥을 돋우던 무녀가 사람들 정신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집을 중심으로 번성하던 무속신앙은 기독교가 볼음도에 전래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특히 6·25전쟁 이후 민통선 설정으로 어선 조업이 힘들어지면서 어업이 점차 감소하고, 가난을 면하자며 전국적으로 일어난 새마을운동이 섬에도 도입되자 당산과 당집은 미신타파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그에 반비례해 기독교인이 된 주민들의 숫자는 갈수록 늘어났다.

볼음교회의 현 예배당은 1990년에 세워졌다. 건축 당시는 섬까지 차도선도 다니지 않던 시절이어서 공사하는 데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완공된 건물이 워낙 크고 웅장해, 주변을 압도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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