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의 섬마을 순례]

강화군 서도면의 주문도는 면적 4.626㎢, 해안선 길이 12.6km, 최고점은 147m인 섬이다. 186가구에 351명의 주민이 산다. 부속섬으로 볼음도, 아차도, 말도 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강화도하면 본 섬만 생각한다. 석모도, 교동도까지는 알더라도 주문도를 비롯해 서검도 비법도 등 주변의 다른 섬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주문도라는 명칭은 조선 후기 임경업(林慶業) 장군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장군이 중국 명나라 사신으로 갈 때 임금에게 하직하는 글을 이 섬에서 올렸다 하여 아뢸 주(奏)와 글월 문(文) 자를 써서 주문도(奏文島)라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주문도(注文島)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서해상을 방어하는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군량미와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가 주문도에 있었다. 섬에는 대빈창(待濱倉) 진촌(鎭村)이라는 마을 이름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과거 군사용 진지와 창고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주문도에는 대빈창해수욕장과 뒷장술해수욕장이 있다. 섬의 서북쪽에 위치한 두 해수욕장은 수천 년 간 서해의 거센 파도가 몰아치면서 자연현상으로 생성됐다. 주문도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뜻을 이름에 담은 뒷장술해수욕장은 모래사장 길이가 2km 정도에 이른다. 간조 시 드러나는 거대한 갯벌에는 조개와 백합 등 다양한 해산물이 서식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수욕을 즐기면서 조개잡기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 백합을 채취하려면 갯벌 멀리까지 경운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물이 빠지면 대빈창해수욕장과 연결된다.
강화도에서 선교사가 건축한 교회 중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만 3곳에 이른다. 1900년에 세워진 성공회 강화성당, 1906년에 세워진 강화 길상면 온수리교회, 그리고 주문도에 있는 서도중앙교회(진촌교회)이다.
1923년 2월 교인들이 건축헌금을 내 짓기 시작한 서도중앙교회는 같은 해 7월 한옥 예배당으로 완공되었다. 팔각지붕에 홑처마집인 이 예배당은 1997년 7월 인천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건축 기술이 뛰어나거나 미적인 가치가 크지는 않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목조 건물형식을 바탕으로 서양식 교회당을 지었다는데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시 섬 주민 1000여 명 중 교회에 다니는 신도가 600~7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장소가 비좁아서 신도들이 몰려들면 하는 수 없이 출입문을 열어 놓고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서도중앙교회의 초석은 윤정일의 전도와 김근영의 회심이었다. 기독교로 개종하며 미친 사람이라고 놀림 받던 김근영은 1905년 당국으로부터 진촌의 군영지를 불하받아서 영생학교를 세웠다. 여기서 신교육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자녀들을 영생학교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김근영에 대한 인식은 점차 바뀌기 시작했고, 주문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당시 진촌의 실력자였던 박승형 박승태 형제가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왔다. 박승형은 무반(武班) 종3품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인물이었다. 형제는 영생학교에 자식들을 보내면서 자신들도 상투를 자르고 개화사상과 문명을 수용하였다. 세도가들이 앞장서자 전 주민이 영향을 받았다. 마을에서는 무당굿과 미신 풍습이 사라졌다. 복음이 처음 들어온 1902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는 무려 75%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1925년 5월 10일 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재정문제로 영생학교 운영이 어려워지자 진촌의 갑부 박용세 씨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자신의 토지 10분의 1(당시 시가 약 1000원)을 자진 기부했다고 한다. 영생학교를 위해 윤인호 씨가 10엔을, 박두병 씨는 100엔을 기부하였다는 내용도 이어진다. 예수를 믿으면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이 외딴 섬 주문도에서 우리는 똑똑히 목격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