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철 교수(새한교회 교육목사·전 총신신대원 강사)

“능동적 순종 개념은 그리스도 은혜 강조하는 의미 담고 있다”

능동적 순종 지지하나 수동적 순종 중요성 잊지 않아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선한 의도와 소신 매도 말아야

권경철 교수(새한교회 교육목사·전 총신신대원 강사)
권경철 교수(새한교회 교육목사·전 총신신대원 강사)

전통적으로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바치신 온전한 순종에는 능동적인 면과 수동적인 면이 있다고 보아왔다. 필자는 본고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 회의록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입장이 어떠하며,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러한 입장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규명함으로써,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이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동기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동기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겠다.

1. 17세기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본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미 17세기에 능동적 순종을 성경적으로 증명 혹은 반박하려는 시도들이 충분히 많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17세기 정통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십자가의 대속적 효력을 약화시켰던 소키누스주의자들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대해 누구보다도 강조했으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는 개념을 확실하게 발전시켰다. 물론 모든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능동적 순종 교리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능동적 순종 교리에 대해 루터파 신학자 카르기우스(George Cargius 혹은 Georg Karg, 1512~1576)가 최초로 조직적인 의문을 제기한 이래로,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에서도 중부 독일 헤르본의 신학자 피스카토르와 같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능동적 순종 교리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그리고 아담이 저지른 죄의 직접적인 전가를 반대하고 모세시대의 율법언약을 은혜언약과 구별되는 별도의 언약으로 보았던 소뮈르 학파와, 구약과 신약간의 불연속성을 매우 강조했던 일부 강성 코케이우스주의자들도 피스카토르의 입장을 어느 정도는 지지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성경적인 교리라고 여겼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4장4절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긍정한 칼뱅의 직속 후계자 테오도르 드 베즈(영어식으로는 베자, Théodore de Bèze, 1519~1605), 베즈의 타락전 예정설을 받아들여 영국에 소개한 것으로 유명한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프랑수아 투레티니(François Turrettini, 투레틴 혹은 투레티누스라고도 알려져 있음, 1623~1687) 프란츠 부어만(Franz Burman, 1628~1679), 스위스 일치신조의 저자인 취리히의 하이데거 (Johann Heinrich Heidegger, 1633~1698) 등이 모두 능동적 순종의 대표적인 지지자들이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본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

17세기 유럽 대륙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신학자들 역시도 성경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를 면밀히 검토하였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영국 국교회의 39신조 제11항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전적인 순종’(whole obedience)이라는 문구를 놓고 약 세 달간에 걸친 열띤 토론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전적인 순종’, ‘능동적 순종’ 등의 진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그 정확한 이유는 오늘날까지도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회의록에 나타난 능동적 순종에 대한 토론들을 분석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행간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참석자 중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 긍정하지 않았던 신학자들은 두 사람이었으니, 바로 리차드 바인스(Richard Vines)와 가테이커(Thomas Gataker)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종하심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성경적으로는 그것이 성도들에게 전가되어 칭의가 가능해진다고 하기보다는 ‘그의 피로’ 구속을 받고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 옳다는 이론을 폈다(엡 1:7; 2:15; 롬 3:25; 히 9:22; 요일 1:7). 가테이커의 경우, 능동적 순종의 근거구절로 알려진 갈 4:4~5, 히 10:7~9, 고전 1:30, 고후 5:21, 그리고 로마서 5장에서 능동적 순종을 찾을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공로가 신자들에게 전가된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시만(Seaman)은 베드로전서 1장 19절과 3장 18절이 신자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혈’, 즉 선한 행실을 가지신 분이시요 의인이신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았다고 덧붙이고 있기에, 그분의 성향적 의로움과 수동적 순종의 공로 뿐만 아니라, 능동적 순종의 혜택 역시도 성도들에게 전가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일(Hoyle)은 로마서 5장이 ‘그리스도의 피’라는 표현을 제유법적으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고, 빌립보서 2장 8절이 증거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수동적 순종에 그치지 않고 능동적 순종이었던 아담의 불순종을 만회하는 능동적 순종도 함께 하셨다는 결론을 내렸다. 프라이스(Price)도 호일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워커(Walker) 역시도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했던 로마서 5장 19절을 바르게 해석하고 올바른 성화론을 가지려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나누어서는 안된다고 성경을 근거로(사 54:14; 51:10; 시 24:5; 시 69등) 바인스에게 충고하였다. 리(Ley)와 바터스트(Bathurst)도, 의롭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죄가 없도록 만든다는 것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포함한다면서, 고린도전서 1장 31절과 고린도후서 5장, 그리고 빌립보서 3장 9절의 말씀이 성립하려면 성도들의 보증인이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모두 인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그리스도의 삼중직과 연결시키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란, 죄를 면제해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의복을 입혀주는 양자됨의 선물과도 같다(눅 15:11~32; 슥 3장)고 보았던 윌켄슨(Wilkenson), 그리고 로마서 5장 19절이 죄 용서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화라는 의의 선물에 대해서 가르친다고 보았던 깁슨(Gibson), 그리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교황주의자들의 말과는 다르게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었음을 갈라디아서 4장 4절과 히브리서 10장 6절이 증거한다면서,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모두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라는 것을 로마서 5장 18절과 누가복음 1장 6절에서 입증하고자 하였던 히어리(Hearle)와 스미스(Smith) 등도 있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능동적 순종을 지지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워커는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능동적 순종을 과도하게 강조하다가 소키누스주의와 비슷하게 보일까하는 경계심을 표출하였고, 바터스트는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능동적인 순종과는 구분되는 그리스도의 수동적인 순종을 가리키는 구절로 남겨두었으며, 심지어는 능동적 순종의 열렬한 지지자이면서도 그리스도의 피(히 5:1; 9:22; 8:3) 없이, 능동적 순종만으로는 구원을 말할 수 없다면서, 복음이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로마서 3장 31절의 메시지를 통해 두 종류의 순종은 결국 하나로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했던 굿윈(Goodwin)과 같은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율법주의자도 아니고, 율법폐기론자도 아니다. 굿윈, 그리고 나중에 레이너(Rayner)는, 갈라디아서 4장 4절이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셨다고 읽기 보다는, 율법 아래 처하셨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께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서의 율법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령에 새롭게 기록된 ‘생명의 성령의 법’, 즉 복음의 진리가 있었다고 본다.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적으로 율법아래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영광의 주님이요 율법의 주인이지만, 동시에 그는 수동적 순종의 산물인 희생제사 뿐만이 아니라 능동적 순종의 예물 역시도 신자들에게 선사하심으로써, 아담의 죄의 결과를 부분적이지 않고 완전하게 반전시키셨다(히 4:16; 5:1; 8:3). 라이트풋(Lightfoot)의 말을 빌리자면, 율법을 어겨 타락하고 죽게 된 인류를 위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편 40장 8절과 히브리서 10장 1~14절이 말씀하듯 제사법이 아닌 “주의 법이 내 심중에 있다”고 고백함으로써, 율법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도 죄와 상관없는 모습으로 원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다. 헤를(Herle)은 인류에게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의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율법폐기론자들 외에는 모두 인정한다면서, 그리스도의 심령에 기록된 율법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을 증거하는 히브리서 10장 7~9절의 가르침대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골로새서 2장 10절이 암시하는대로 ‘충만함’을 위해 신자들에게 전가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것은 공로주의나 율법주의도 아니고, 율법폐기론도 아니다. 다만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율법의 요구인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레 18:5)를 신자들을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교리가 필요한 것이다(롬 8:3).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 능동적 순종을 하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해 하신 것이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바터스트의 말처럼, 이러한 의의 전가를 통한 칭의와 성화에는 인간의 그 어떤 공로도 있을 수 없다.

3. 나가는 글

지금까지 필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17세기 영국 신학자들이 진지한 성경주해에 근거한 교리적인 토론을 통해,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을 부인하는 소키누스주의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회의적인 율법폐기론자들의 양극단을 모두 피하려고 시도하였다는 사실을 웨스트민스터 총회 회의록을 바탕으로 증명하였다. 비록 결과적으로만 볼 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최종본에 ‘온전한 순종’이라는 말이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그 전가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은,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이 결코 사변적인 동기에서 능동적 순종 교리를 논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능동적 순종 교리를 찬성하든지 반대하든지 관계없이,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의 신학에 있어서도 최고의 권위는 성경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작성에 참여한 신학자들 중 대다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교리를 ‘선하고 필수적인 결과로서 성경으로부터 연역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보고 찬성한 것이고, 그 교리에 반대하였던 이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교리를 성경에서 연역해내기 어렵다고 보았기에 반대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개념은 성경의 주요 가르침에서 멀리 떠난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동기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력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하고자 하는 저의를 담고 있는 교리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성경적이라는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의 소신이 옳았는지 여부를 묻고 그 소신을 뒷받침하는 그들의 성경해석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자유요 특권이겠으나, 그러한 자유를 남용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선한 의도까지 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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