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우리나라에서 하루 2만 마리, 1년이면 800만 마리의 새들이 죽고 있다. 미국은 2억, 캐나다는 2500만 마리라고 한다. 왜 죽고 있을까? 유리벽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차량 소음을 막기 위해 세운 도로변의 소음방지 유리벽, 그것이 주범이다. 유리벽에 의해 살해되고 있는 것이다. 온갖 철새를 비롯하여 희귀종까지 죽어간다. 시베리아에서부터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새들이 그 날개를 접고 만다. 너무 안타까운 죽음이다.

유리벽만이 아니다. 고급 건축재인 유리로 마감한 거대한 빌딩들도 새들에게 죽음을 안기고 있다. 유리벽에 비친 반대편 숲의 모습을 실제 숲으로 착각한 새들이 날아들다가 죽는다고 한다. 이런 유리창을 구별 못하는 새를 어리석다고 말하겠는가?

멋진 빌딩과 소음 차단벽이 새들의 무덤이 되고 만다. 일반적으로 새는 시속 20~75km로 난다고 한다. 그 속도로 날다가 유리벽이 부딪혀 죽으니 이보다 더 날벼락 같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부리가 깨지고, 목이 부러지고, 그 작은 몸이 부서져 죽는 새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게 뭐지? 왜 부딪히지?’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이런 죽음을 막을 방법이 없지 않다고 한다. 가로 세로 5cm간격으로 하얀 점만 찍어두면 새는 이를 장애물로 인식하여 충돌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리벽. 보이지 않아 생기는 일이다. 어디 새뿐이랴? 우리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꿈을 접기도 하고, 거의 죽은 것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치고 있지는 않은 지 생각해 본다.

벽이 아닌 줄 알았는데 부딪히고 나서야 느끼는 벽들도 있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심리적으로 주눅들게 하는 압박의 벽들, 그리고 사회적 편견과 세대 갈등의 벽들.

세상 뿐 아니다. 모든 벽을 헐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그 벽을 헐지 못한 채 누군가 다가올 수 없고, 의식조차 하지 않은 채 잘못 부딪혀 죽을 수 있는 유리벽은 아닌지? 예수님조차도 부딪힌 종교적 벽들이 많았다는 생각을 하면, 나도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어느새 벽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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