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인 목사(청량교회·총신대학교)

주님의 기도는 지구공동체 돌보는 복음이 됩니다

송준인 목사(청량교회·총신대학교)
송준인 목사(청량교회·총신대학교)

1. 본문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2. 본문 선정 배경

6월 5일은 1972년 유엔(UN)이 정한 ‘환경의 날’이다. 작금의 환경문제는 국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라는 데 이의가 없다. 미국의 억만장자이자 탐험가인 빅터 베스코보(Victor Vescovo)는 지난 2019년 5월 1일 특수 잠수정을 타고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다 잠수에 성공했다. 그는 서태평양 괌 인근의 마리아나 해구의 가장 깊은 챌린저 해연의 수심 1만928미터 지점까지 잠수했다. 놀라운 것은 인간의 손길이 한 번도 닿은 적이 없던 그 깊은 바다 속에서 비닐봉지, 사탕 포장지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베스코보는 거기에서 반투명한 갑각류의 몸속에 미세플라스틱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변압기 절연체로, 화재 방지가 목적인 난연재로 사용된 물질이었다. 그 물질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 분해가 거의 되지 않기 때문에 동물의 사체를 통해 바다 밑바닥까지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나 해구에서 채집한 생물체에서 방사성 물질인 C14가 검출되었는데, 그것은 핵실험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빅터 베스코보는 지구상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한 감격보다는 그곳까지 오염된 지구의 환경문제를 보고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지금 지구는 그만큼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3. 주기도문과 생태계 위기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다. 이 기도는 지구공동체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안내서로서, 새롭게 해석될 가치가 있는 기도다. 이번 기고에서는 우리 시대의 지구적 위기, 즉 생태정의의 위기에 응답하면서 우리 삶의 방식을 위한 영적인 보물인 주기도문을 생태학적으로 묵상해 보고자 한다.

우리 시대에 생태계 파괴와 사회적 불의라는 위기가 무섭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국지적인 수준을 넘어 전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고, 생태계와 공동체뿐만 아니라 지구공동체 전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의 구절들이 기독교인들에게 환경적·생태학적으로 무슨 의미를 갖는지 유념할 때, 우리는 이런 도전에 맞설 신앙적인 세계관과 일관된 행동방식을 분별하게 된다.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고 정의롭게 대하도록 우리를 부르는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생태계와 정의를 위해 창조세계 보전에 헌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자연과 사회의 건강을 무시하면서 편협하게 자신의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의 관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이 세계가 곧 끝날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 땅에 살고 있는 빈곤한 사람들과 멸종 위기에 처한 종들, 갈수록 파괴되는 생태계의 복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지구공동체에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그 생태학적 의미를 설교문으로 들어보자.

4. 주기도문의 생태학적 의미에 대한 설교
첫째,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거룩하시기에 이름을 직접 부를 수도 없는 문화 속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을 친밀한 개인적인 이름인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아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보여준다.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를 온 지구공동체 안에 위치시키며, 그것에서 거룩한 존재의 근거와 만나게 한다. 이 기도 안에서 우리를 낳으신 분과 그로부터 나온 모든 호흡 있는 생명들에게 말을 걸게 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와 우리의 창조주, 그리고 모든 창조세계를 풍성하게 연결시켜준다.

둘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대하게 한다. 모든 피조물은 우리의 친족(kin)이며, 우리는 다함께 친족의 나라(kingdom)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창조세계를 올바른 관계에 기초하여 지속가능한 공동체로 세워나가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표지는 나타난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그 정반대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피조물의 친족관계를 깨뜨리고 건강한 지구공동체를 파괴한다. 사회적 불평등은 날로 심각해져 가고, 환경 파괴는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환경오염과 기후변화는 지구공동체의 복지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갖는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억압과 절망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며 그 탄원을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셋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 일용할 양식의 필요에 대해 기도할 것을 요청받는다. 오래 전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주우며 배웠듯이, 음식을 축재하면 고약한 냄새가 나고 썩는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학자 래리 라스무센은 “충분은 기준이고, 평등은 가능성이며, 나눔은 방향이다”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있으면 충분하고, 그 다음에는 평등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 구체적인 방법은 나눔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회든 기본적인 필요, 이를테면 식량, 의복, 보건, 교육, 일자리, 주거 등을 채워줄 자원들을 가졌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사회는 정의의 시험에서 실패한 것이다. 정의로우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운동은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넷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런 공로나 자격도 없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우리는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줌으로써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 간의 중요한 지침일 뿐 아니라, 공동체적인 책임이기도 하다. 주님의 기도에서 죄는 사실상 빚(debt)을 말한다. 이 용서의 탄원, 즉 빚의 탕감에 대한 탄원은 희년 전통에서 강력한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자주 식탁 교제를 나누신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님과 다른 사람 앞에서 빚진 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분명 이웃들에게 버림받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최저 수준 이하의 임금으로 말 그대로 채무의 악순환에 시달리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빚진 자들의 빚을 용서해 주고 탕감해 주라는 것이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도 이런 억압적인 빚을 용서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농업을 지원하고, 생태보전, 노동자의 인권보호, 사회정의, 생태정의 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해야 한다. 우리가 이런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줄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신다.

다섯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마지막 탄원은 가정과 직장과 여가 등에서 나날이 마주하는 유혹의 목록을 끊어내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험(temptation)은 유혹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많은 수입, 더 많은 소유, 안락한 시설, 에너지 소비, 가족의 행복, 직업과 관련된 성취, 더 큰 주택, 더 큰 자동차 등 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 한다고 믿는 우리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다른 자세를 취할 것을 요청한다.

5. 도전과 응전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지구공동체에 선한 영향을 미치며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가 개인적인 삶을 위해 지구와 사람들을 향한 돌봄을 의미한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어야 한다. 주님의 기도는 그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주님이 가지셨던 비전을 공유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그 비전과 가치를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그것은 지구공동체를 위한 복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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