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부끄러워 말도 못하는 죄들이 뻔뻔스럽게 활개 치며 뉴스로 돌아다닌다. 입시 비리, 사문서 위조, 성범죄 선거, 지위를 이용한 땅 투기 등 예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슬픈 일들이다. 그 뿐 아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대담해져서 엄청난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해내는 내로남불을 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라기보다는 인간의 상대적인 규범 앞에서 죄를 생각하고, 양심의 소리보다는 이해관계의 소리에 더 민감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죄냐 아니냐의 관점보다는 들켰느냐 안 들켰느냐의 관점에서 죄 문제를 생각한다. 사회가 부패하기 전에 인간이 먼저 부패하고, 세상이 부패하기 전에 언제나 교회의 부패가 먼저 있기 마련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그러나 실제로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죄악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죄의 이야기는 가인의 이야기만도 아니요, 노아 홍수나 소돔 고모라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죄의 이야기는 바로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서 쉽게 발견하고, 거룩해야 하는 목회자들과 교회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실제 예화이다. 인간의 이야기란 바로 죄의 이야기이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악의 제조공장과도 같다. 인간의 본질은 죄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죄의 본성과 연결되어 있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인간 최대의 문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죄의 문제이다. 우리 지구의 최대 문제도 다른 것이 아니라 죄가 마음대로 활개치고 다닌다는 데 있다. 

우리 사회를 잘 살펴보자. 폭력과 거짓과 음란이 심해져가고 있는 것을 본다. 어느 누구도 죄의 위력 앞에 기를 못 펴고 조심하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 폭력과 음란이 요동하고 있다. 조직적인 악의 세력들이 들풀처럼 무섭게 번지고 있다. 어른들은 걷잡을 수 없이 부패하고 있다. 교회는 죄를 꾸짖고 죄를 추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죄를 몰아내야 한다. 숨을 쉬지 못하게 해야 하고 활개 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죄를 추방하기 위해선 먼저 죄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죄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으로 선포되지 않을 때 죄는 만연해지기 시작한다. 말씀이 무시당하고 하나님이 거부당할 때 죄는 자라기 시작한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거부했을 때 죄가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죄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다.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아름다운 자연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절망적이 되어 서로 미워하고 저주하고 싸우는 관계가 되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만인은 만인에게 적이 되었고 원수가 되어 그 결과 인간은 인간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발견할 수 없는 물질에 불과하다. 인간이 바벨탑을 쌓을수록 하나님은 더욱 멀어지게 되며 동시에 죄는 더욱 깊어지게 된다. 오직 길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죄를 미워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결단코 죄를 용납하지 아니하신다. 죄가 있는 곳에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축복이 있을 수 없다. 단지 저주와 심판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처럼 우리도 죄를 미워하고 꾸짖고 쫓아내야 할 것이다. 교회의 부조리와 사회의 죄악도 크지만 가장 큰 죄는 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변할 때 세상이 변한다. 누가복음 5장 8절에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우리 모두 믿음의 소리로 크게 외쳐 보자.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들아 떠날지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