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언 목사의 섬마을 순례]

증도(甑島)라는 지명을 순 우리말로 바꾸면 ‘시루섬’이다. 밑 빠진 시루처럼 물이 스르르 새어 나가버리는 섬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증도에는 물이 귀하다.

다른 의미도 있다. 원래 증도는 앞시루섬과 뒷시루섬, 그리고 우전도라는 3개의 작은 섬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앞시루섬과 우전도가 간척으로 합해지며 전증도가 되고, 뒷시루섬이 후증도가 되어 2개의 섬으로 변했다. 그러다가 다시 전증도와 후증도 사이를 간척하여 하나의 섬으로 합치면서 오늘날에는 ‘더한 섬’ ‘늘어난 섬’이라는 뜻의 증도(曾島)가 됐다.

2010년 3월 증도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증도는 최악의 교통 오지였다. 실제로는 뭍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지만 교통수단 때문에 이동에 많은 고초가 따랐다. 60년대 전후 증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내려서 걷고, 다시 배를 타고 내려서 걷기를 서너 번 반복해야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이 여정이 대략 여섯 시간 정도 걸렸다고 한다.

면적이 큰 증도에서는 염전과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산물들을 육지까지 운반하는 유통과정이 큰 문제였는데, 이를 해결한 것이 차도선이었다. 대형차들을 가득 싣고 온 차도선은 소금과 쌀을 가져가기도 했지만, 수많은 관광객들을 데려오는 역할도 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보물섬’으로서 증도의 진가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 해 1만6000톤의 천일염을 생산하며 한국에서 단일 규모로는 두 번째로 크다는 태평염전, 아름다운 해안선과 10만 그루의 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한반도 해송숲’을 자랑하는 우전해수욕장, 이름 자체가 ‘보물섬’ ‘황금도시’를 뜻하는 엘도라도 리조트, 눈이 툭 튀어나와 우습게 생긴 철목어와 환상적인 낙조를 관찰할 수 있는 짱뚱어다리 등이 관광지 증도의 보물들이다.

그런데 증도에 ‘보물섬’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진짜 사연은 따로 있다. 섬 서쪽의 만들 앞에는 조그만 무인도에 ‘700년 전의 약속’이라는 간판을 단 카페가 있다. 카페에서 바라보는 일대가 바로 1975년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 시대 유물들이 대거 발굴된 신안 앞바다이다. 두 어부의 그물에 처음으로 끌려나온 도자기들은 이후 10차례의 인양작업을 거치는 동안 2만3024점이나 올라왔다. 해방 이후 국내에서 발견된 가장 큰 보물선이었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보물이 증도에 존재한다. 바로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가 그 주인공이다. 문 전도사는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 출신이다. 1908년 3월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홀로 20년간 시부모님을 모시다가 목포로 나왔다. 북교동교회에 출석하던 문 전도사는 이성봉 목사의 가르침을 받아 1930년 서울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대)에 입학했다.

방학 때에는 신안군 임자도로 내려와 20명의 신자와 60명의 주일학생을 모아서 예배를 드렸다. 1933년에 임자도 진리교회, 1935년에는 증도 증동리교회를 개척한 것을 시작으로 여성의 몸으로 나룻배를 타고 여러 섬을 다니며 복음을 전해 대초리교회, 방축리교회, 제원도교회, 우전리교회, 사옥도교회 등을 세웠다. 산파와 집배원 역할도 했다고 전해진다.

섬 사람들 사이에는 샤머니즘의 영향력이 유난히 강하다. 하지만 증도에는 주민 10명 중 8명이 기독교인이며, 절이나 신당은 하나도 없는 대신 교회들로 가득해 ‘기독교 성지’로 불린다. 문 전도사의 헌신적 전도사역 덕분이다. 그러나 본인은 1943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여러 차례 투옥되어 고문을 당했으며,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공산군에 의해 증도에서 순교했다.

고인이 숨진 짱뚱어다리 맞은 편 증동리에는 2010년 문준경순교기념관이 건립되었고, 묘소가 있는 소공원에는 기념비를 비롯한 여러 조형물들이 설치되었다. 한 여인의 뜻깊은 순교역사를 살필 수 있는 증도로 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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