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기자
정재영 기자

코로나19와 함께 한 두 번째 겨울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합니다. 짜증이 오를 대로 올라있는 경우, 거꾸로 아예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경우도 자주 마주칩니다. 보통사람들이라면 어디에든 스트레스를 왈칵 터뜨리거나 누구한테든 푸념 한바탕 쏟아놓는 게 심기일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대표하는 자리, 누군가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면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의 무게가 제법 차이 나게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어지간하면 묵묵히 듣고 넘길 수 있는 잔소리나 불평들마저, 말하는 사람의 비중에 따라서는 꽤 깊은 앙금이 남는 항의나 비난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역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언어사용에 신중하도록 여러 차례에 걸쳐 가르친 데는 이런 이유가 클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특히 목회자를 비롯한 교회나 단체의 지도자들이 세간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립니다. 더 이상 예배나 사역을 중단할 수 없다며 방역지침에 맞선 행동부터가 교회 바깥 세계에는 꽤 불편하게 비쳐졌을 텐데,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말 한마디와 표정 하나가 더 큰 화를 불러오는 양상입니다. 그 책임이 당사자들에게만 돌아가지 않습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덩달아 욕을 먹고, 복음전파의 기회가 사라집니다.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300>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적군의 창끝, 화살촉 하나 침범할 수 없을 정도로 빈틈없이 편성된 전투대형이 누군가 흥분하여 앞서나간 한걸음, 누군가 겁을 먹고 뒷걸음친 한걸음으로 무너지게 된다는 대목입니다. 잠시의 실수가 승리할 수 있었던 전쟁을 패배로 마감하게 만듭니다.

각자의 대오를 지키며 더 견뎌봅시다. 당장은 답답하고 초조해서 죽을 것 같아도, 그 고통의 강도라는 게 카타콤 시절을 견딘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6·25 내내 숨죽이며 지내야 했던 이 땅의 신앙선배들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곧 있으면 동백꽃 활짝 피어나고, 조금씩 봄이 다가오는 소리도 들리겠지요. 큰 함성 한 번 내지를 힘을 그 때까지는 아껴둡시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