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기독여성 독립운동가를 소개합니다
[역사기획] 기독여성 독립운동가를 소개합니다
  • 정재영 기자
  • 승인 2020.12.22 1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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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독립투쟁 현장서 자신을 불사르다

겨레의 역사를 통틀어 봐도 시대의 전면에 등장하거나, 두고두고 위인으로 추앙되는 여성들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희소하다. 특히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선 여성들의 이름을 19세기 이전 공적 기록들에서 찾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도전에 가깝다.
이 땅에서 여성들이 자주적인 의식을 지닌 구국의 주체로 본격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무렵부터이다. 여기에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계몽하여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는 일에 앞장선 기독교 선교사들의 역할이 컸다. 이화학당은 그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학교 중 하나이다.
이화박물관(관장:김혜정)이 내년 3월 31일까지 개최하는 ‘이화의 독립운동가들’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거친 투쟁의 현장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른 32명의 여걸들을 만날 수 있다. 본지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유관순 열사와 그의 스승 김란사, 사촌언니 유예도 등을 제외하고 특히 인상적인 생애를 살았던 아홉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김복희(1903~1987)
1919년 3월 31일 밤, 충남 아산의 방화산에는 봉화가 오르고, 연이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백암리만세운동이라 불리는 이 시위의 주도자 중 한 사람은 이화학당 여학생 김복희였다. 그녀는 만세운동 도중 총을 쏘며 추적하는 일본 헌병을 피해 달아나다, 낭떠러지에서 굴러 눈을 크게 다치고 얼굴에 흉터가 생겼다.

체포된 후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김복희는 결혼 후 경기도 화성에서 생활한다. 남편 전재풍 목사를 도와 천곡 샘골교회를 돌보는 한편으로,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 최용신의 후임으로 강습소를 맡아 일제의 집요한 방해에 맞서며 농촌계몽과 육아사업에 헌신했다. (대통령표창)

▲권애라(1897~1973)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여전히 독립을 갈망하는 이들의 심장을 울리는 명 연설가가 등장했다. 정동교회와 수표교회에는 권애라라는 여성의 강연을 듣기 위해 군중들이 몰렸다. 만세운동 당시 개성 충교교회 유치원 교사로 근무하던 권애라는 호수돈여학교 학생들과 개성만세운동을 일으켰고, 9개월의 옥고를 마친 후에는 애국 강연자로 변신했다.

‘반도의 희망’ ‘잘 살읍시다’ 등 명 연설을 남긴 그녀는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한민족 여성대표로 참가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다. 봉천 길림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1942년 일본 관동군에 체포되어 12년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옥중에서 광복을 맞았다. (건국훈장 애국장)

▲현덕신(1896~1962)
1920년 3월 1일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느닷없는 만세함성이 터져 나왔다. 조선인 유학생들이 또다시 적진 한복판에서 한민족의 기개를 과시한 것이다. 2·8선언 당시 혼자 힘으로 40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을 독립자금으로 마련했던 여학생 현덕신은 이번 거사에도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후로도 자신의 유학생활을 꼬박 독립운동으로 채우며 일제의 1급 요시찰 인물이 되었던 현덕신은 귀국 후, 2·8선언의 동지였던 최원순과 결혼해 전라도 광주에서 활동한다. 여성 애국단체인 근우회 창립에 기여하는가 하면, 광주 최초의 여성의사로서 자신이 세운 현덕순병원을 통해 여성운동과 보육사업도 전개했다. (건국포장)

▲조신성(1873~1953)
1920년 11월 한 여성이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독립사상 고취, 군자금 모집, 친일파 응징, 관공서 파괴 등 평안남도 일대를 무대로 엄청난 양의 활동을 보여준 조신성에게는 ‘맹산의 호랑이’라는 별명이 따라 붙었다. ‘가슴에다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수시로 변장을 해가며…’ 라고 그녀의 활약상을 묘사한 기록도 남아있다.

이화학당의 초대 총교사를 지내고, 평양 진명여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다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교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조신성은 이후 적극적인 항일투사로 나섰다. 무장투쟁까지 불사하다 붙잡혀 2년 6개월 간 옥살이를 한 후에도, 근우회 여성실업장려회 조선교육학교 등을 통해 애국활동으로 생을 일관했다. (건국훈장 애국장)

황애시덕(왼쪽 아래)이 주모자로 지목된 애국부인회 사건에 대한 매일신문 보도.
황애시덕(왼쪽 아래)이 주모자로 지목된 애국부인회 사건에 대한 매일신문 보도.

▲황애시덕(1892~1971)
1919년 2월 19일자 매일신보에는 ‘가경할 비밀결사 남녀의 독립음모단’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네 남녀의 사진이 실렸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비밀리 모금활동을 벌여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한 사실이 일본경찰에 발각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애국부인회 총무 겸 편집인이던 황애시덕이 주모자로 지목됐다.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이던 황애시덕은 1913년 송죽회를 조직하며 해외 독립운동 단체를 후원했다. 2·8독립운동 때도 독립선언서를 애국지사들에게 전달하는 등 국내외 독립운동 조직을 연결하는 활동을 펼쳤다.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복역한 후에도 여성교육과 농촌지도자 양성에 헌신했다. (건국훈장 애국장)

▲최금봉(1896~1983)
황애시덕처럼 대한애국부인회 활동 중에 체포된 인물들 중에 진남포 삼숭소학교 교사로 일하던 최금봉이 있다. 2년 6개월 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된 그녀에게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약해진 몸에 늑막염과 장티푸스까지 찾아왔다. 일제는 가석방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불온사상자로 낙인 찍혀 더이상 교사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최금봉은 다시 치의학 공부를 시작하고,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치과의사가 된다. 이후 진남포와 안동에서 치과병원과 함께 유치원을 개원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무상으로 돌보는 의사로 소문나기도 했다. 6·25전쟁 후에는 기독교여자절제회와 YWCA를 통해 구제활동에 매진했다. (건국훈장 애국장)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원들이 1919년 10월 11일 단체로 촬영한 기념사진. 앞줄 왼쪽 끝이 이화숙이다.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원들이 1919년 10월 11일 단체로 촬영한 기념사진. 앞줄 왼쪽 끝이 이화숙이다.

▲이화숙(1893~1978)
1919년 10월 11일 상해 임시정부 직원들이 촬영한 기념사진에는 32명의 인물들 중에 단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이화숙과 김원경은 상해임시정부가 헌법에 선포한 남녀동등권 원칙에 따라 국무원 참사로 서임했다. 이화숙은 앞서 한성임시정부에서 발표한 ‘공약 삼장’에 민족대표 30명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는 초창기부터 임시정부의 핵심 일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자금 모금과 국내 독립운동조직과의 연대활동을 전개하는 일에 앞장섰다.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해 간호인력 양성소를 설립하고, 직접 간호사 훈련과정을 수료했다. 훗날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남편 정양필과 함께 광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독립운동 후원활동을 전개했다. (건국훈장 애족장)

▲이애라(1894~1922)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일본 헌병에 몸수색을 당하던 평양 정의여학교 교사 이애라는 잠시 딜레마에 빠졌다. 이대로 붙잡히면 쫓기는 중이던 같은 학교 교감이자 남편인 이규갑을 비롯해 독립운동 조직 전체가 위태로워질 상황이었다. 

결국 엄마는 아기를 차가운 길바닥에 버린 채 도망하는 눈물겨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일찍 생을 마감한 아기는 애국부인회에서 대신 장사지냈다. 하지만 엄마 역시 얼마 후 아기의 뒤를 따라갔다. 시베리아로 망명했던 이애라는 1922년 비밀문서를 전달하려 국내에 들어오다 함경북도 웅진에서 체포됐다. 그리고 지독한 고문 속에 옥중에서 슬픈 삶을 끝마쳤다. (건국훈장 독립장)

홍애시덕(뒷줄 맨 왼 쪽)을 비롯한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들이 애국운동을 위해 결성한 7인 전도대.
홍애시덕(뒷줄 맨 왼 쪽)을 비롯한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들이 애국운동을 위해 결성한 7인 전도대.

▲홍애시덕(1892~1975)
이듬해인 1920년, 전국을 순회하며 사람들을 모아 강연을 하고 다니는 여성들이 등장했다. 이화학당의 교사와 학생들로 구성된 이 여성들은 ‘7인 전도대’라 불렸다. 진짜 의도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홍애시덕이었다.

홍애시덕은 모교인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만주의 무관학교 지원을 위한 동지회 결성으로 애국운동을 시작했다. 3·1운동과 7인 전도대 활동에 가담해 활동을 이어가던 그녀는 이후 조선YWCA와 기독교여자절제회 등의 결성에 큰 몫을 했다. (건국훈장 애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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