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에 촬영한 구천교회 전체 교우들.
1935년에 촬영한 구천교회 전체 교우들.

근대기 교회건축문화 ‘헌신의 역사’ 품다
남녀 다른 출입구 등 외형과 내부 80여 년 전 모습대로 간직 … 풍부한 역사탐방 가치 높아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한 건물에 남자와 여자의 출입구가 다르고, 좌석 또한 좌우로 구분된 예배당이 여태 남아있다는 사실부터가 흔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건물의 외형과 내부 그리고 당시 사용한 물품까지 상당부분이 80여 년 전 모습대로 간직돼있다는 점은 놀랍기만 하다.

경북 의성군 구천면 용사리 소재 구천교회(홍재열 목사)의 자랑 중 하나는 1937년에 건축한 옛 예배당이다. 특히 지역 일대의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들 중에서도 근대기 예배당 양식으로 지은 옛 건물을 보존중인 드문 사례에 속한다.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을 청원한 의성 구천교회의 옛 예배당. 1937년 건축한 이 건물에는 출입구부터 남녀를 구분한 근대기 교회건축문화가 담겨있다.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을 청원한 의성 구천교회의 옛 예배당. 1937년 건축한 이 건물에는 출입구부터 남녀를 구분한 근대기 교회건축문화가 담겨있다.

40평짜리 단층으로 지은 이 예배당은 건축 당시로서는 꽤 큰 건물에 속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밖으로 드러난 부분들을 들여다보면, 안쪽으로 수숫대에 황토흙을 이겨 벽체를 만들고 그 위에 회반죽을 씌운 후 ‘스기목’이라고도 불리는 적삼목으로 내부를 마무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남녀가 출입구를 따라 각자의 지정석에 앉아 예배하는 풍습이 구천교회에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녀 청중석 사이를 차단하던 가림막을 철거한 부분이 사실상 가장 큰 변화라 하겠다. 건물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좌우 출입구의 신발장이며 발판, 마치 극장무대처럼 구조가 짜인 강대상의 모습도 예전과 같은 풍경을 유지하고 있다.

진주 소씨 집안 출신으로 구천교회에서 3대째 장로로 시무한 후 은퇴한 소재성 장로는 “현재도 교육관과 새벽예배 장소로 사용하는 옛 예배당에 들어갈 때마다, 그 자리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시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떠오른다”면서 “대구동신교회의 도움으로 바닥 등 건물 일부를 수리한 것을 빼놓고는 내부 모습이 거의 달라진 게 없다”고 설명한다.

②현재는 교육관으로 사용되는 옛 예배당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자취가 거쳐 간 신발장과 발판 같은 물품들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현재는 교육관으로 사용되는 옛 예배당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자취가 거쳐 간 신발장과 발판 같은 물품들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소재성 장로의 조부 소병화 장로는 1922년 허버트 에드가 블레어 선교사, 주전탁 영수 등과 함께 구천교회를 일으킨 설립자 중 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동네이름을 따 용사교회라 불리다가,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구천’이라는 명칭에는 지역 명칭인 구천(龜川)이라는 뜻 외에도 ‘천국복음으로 구원한다’는 구천(救天)의 의미를 담았다.

구천교회에는 옛 예배당을 비롯해, 교우들의 기지로 일제의 공출을 피해 살아남은 종탑, 온 교우들이 직접 벽돌을 굽고 강에 나가 모래를 지어 나르며 1979년 완공해 낸 현재의 예배당, 역대 교회를 이끌어 온 인물들의 면면을 보여주는 비전홀 등 사연 담긴 공간들이 수두룩하다.

뿐만 아니라 구천교회의 첫 예배처소로 사용되었던 주전탁 영수의 집, 순교자 지정을 받은 제2대 주낙서 목사의 묘소, 6·25전쟁기에 교회에서 운영한 야학기관인 용사학교 터 등이 주변에 산재해있어서 자체 역사탐방 코스를 개설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풍부한 유산들이 있기에 구천교회는 경중노회(노회장:추성환 목사)의 헌의를 통해 제105회 총회에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청원을 하고, 현재 총회역사위원회의 심사를 기다리는 중이다.

구천교회 비전홀에 전시된 초창기 담임목사와 장로들의 모습.
구천교회 비전홀에 전시된 초창기 담임목사와 장로들의 모습.

구천교회 역사에 기억될 신앙인물들

구천교회 초대 당회장인 허버트 에드가 블레어(한국명 방혜법) 선교사는 미국북장로교 소속으로 1904년 한국에 부임해, 1913부터 대구·경북 일대에서 사역한 인물이다. 1922년 용기동교회를 설립하는 등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돌보았으며, 교남YMCA를 조직해 기독교사회운동의 기틀도 마련했다. 일제에 의해 1941년 추방된 후, 필리핀에서 영양실조로 생을 마쳤다.

방혜법 선교사를 이어 구천교회 첫 한국인 당회장을 지낸 인물은 주낙서 목사이다. 교회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주전탁 영수의 아들인 주낙서 목사는 1929년부터 7년 동안, 1937년에 3개월 동안 두 차례 구천교회를 담임했다. 그는 훗날 울릉도로 건너가 사역하던 중, 1944년 12월 어느 겨울날 전도하러 나선 길에 폭설에 갇혀 순직했다.

일제강점기 전쟁물자 공출을 피해 교우들이 종을 몰래 숨겨둔 비화가 서린 교회당 종탑.
일제강점기 전쟁물자 공출을 피해 교우들이 종을 몰래 숨겨둔 비화가 서린 교회당 종탑.

또 한 명의 설립자인 소병화 초대 장로의 집안에서도 3, 4, 7대 당회장을 지낸 소병영 목사와 9대 당

회장을 지낸 소도열 목사 등이 대를 이어 구천교회 강단을 지켰다. 소병화 장로의 아들 소영열 장로에 이어 손자 소재성 장로까지 3대를 이어 시무하며, 온 가문이 구천교회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이북 출신으로 11대 당회장에 부임한 김치묵 목사는 6·25가 아직 한창이던 1953년에 야학과정인 용사학교를 세웠다. 역시 월남한 피난민이었던 임창하 선생의 헌신적 봉사 속에서 용사학교는 여러 젊은 인재들을 길러내며, 삼분교회가 운영한 삼성중등강습회와 함께 의성 삼성중학교의 뿌리 역할을 했다.

대구동신교회 권성수 목사의 외가로 알려진 16대 정태석 목사의 가문도 구천교회의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전쟁 물자로 강제 공출될 뻔 한 예배당 종을 집안 소유지에 몰래 숨겨두었다가 해방 후 다시 종탑에 매달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천교회 역사관 역할을 하는 비전홀에는 역대 담임목사와 장로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선배들의 자랑스러운 자취를 후세들에게 보여준다.

“신앙유산 물려줄 미래 만들 터”

구천교회 홍재열 목사

구천교회 옛 예배당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는 홍재열 목사(가운데)와 소재성 은퇴장로. 사진 오른쪽은 경중노회장 추성환 목사.
구천교회 옛 예배당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는 홍재열 목사(가운데)와 소재성 은퇴장로. 사진 오른쪽은 경중노회장 추성환 목사.

“작년에 처음으로 홈커밍데이를 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어르신들이 반가움에 서로 붙들고 우시느라 예배시간이 지연될 지경이었습니다. 진작부터 이런 자리가 그리웠다는 어르신들 말씀을 듣고, 우리 교회를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올해에는 코로나로 건너뛰어야 했지만, 앞으로 여건이 되는대로 계속 자리를 마련하려 합니다.”

구천교회 홍재열 목사에게는 과거의 유산을 보존하는 것 못지않게 골몰하는 과제가 교회의 미래를 위해 오늘을 충실히 보내는 일이다. 지나온 시간들이 아무리 자랑스럽더라도, 그 유산을 물려줄 대상이 남아있지 않다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세월처럼 잊히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환경은 결코 쉽지 않다. 나이 90이 넘어야 겨우 ‘장수하셨다’며 생일축하를 받는 초고령 농촌사회에서 어떤 소망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홍 목사는 고구마를 굽고, 팝콘을 볶아 마을회관과 장터와 주민들이 농사짓는 현장까지 찾아간다. 어떻게든 이웃들과 대화의 물꼬를 트고, 관심사를 나누기 위해 노력한다.

다행히 그 노력은 배신하지 않고 열매를 거두고 있다. 갈수록 심화되는 이농현상에다 올해에는 전염병까지 기승을 부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꾸준히 결신자가 나왔다. 교구가 한정되기 마련인 여느 농촌교회들과 달리 구천교회에는 인근 17개 마을에 고루 성도들이 분포해있다.

구천면 1800명 인구 중 1/10을 전도한다는 목표로 ‘하면 된다 180명’ 슬로건으로 홍 목사는 성도들과 함께 다시 전도자의 신발을 질끈 동여맨다. 100주년을 맞는 2022년을 기점으로 새예배당을 건축하고, 100년사를 발간하며, 지역사회 교제의 장으로 카페를 개설하는 계획들도 세우며 온 교회가 벌써부터 가슴 설렌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의성 서부지역의 중심이 되는 교회로 다시 일어서는 꿈을 꿉니다. 사라지는 역사가 아니라 두고두고 계승되는 역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