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독립운동 투신한 기독 선열 기리다
창간과 발간 과정서 많은 기독인 기여 ... 임시정부 기관지 역할 수행

어느 시대에나 개인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신한 영웅들이 존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땅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이들 덕에 겨레의 역사도 정체성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온 세계에 자랑스러운 저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세상은 다시 어지러운데, 언제부턴가 교회가 칭찬 대신 손가락질을 받는다. 영광스러웠던 시대의 자취 몇 조각을 회상하며, 우리의 길을 회복하는 지표로 삼아보자. <편집자 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상과 국내외 독립운동 관련 동향을 널리 알린 상해독립신문 창간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상과 국내외 독립운동 관련 동향을 널리 알린 상해독립신문 창간호,

① 상해독립신문과 기독교

‘독립’(獨立)이라는 두 글자가 제호로 똑똑히 새겨졌다. 내 나라, 내 땅에서가 아니라 머나먼 타국에서 배고픔과 설움을 견디며 만들어낸 소중한 결과물이었다. 네 쪽짜리 이 신문은 이후 조국 광복을 꿈꾸며 살아가는 동포들에게 더할 나위없는 기쁨과 희망이 되었다.

3·1만세운동이 힘차게 전개된 1919년은 희미해져가던 겨레의 독립의지가 곳곳에서 되살아나는 시기였다. 이 무렵 수많은 지하신문들이 국내외에서 발간되었다. 일제의 무단통치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언론활동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었기에, 신문을 만드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저항행위였다.

1919년 8월 상해에서 창간된 ‘독립신문’은 그 중심에 있던 존재였다. 1896년 독립협회가 창간한 ‘독립신문’과 구분하기 위해 ‘상해독립신문’ 혹은 ‘독립신문상해판’으로도 불리는 이 신문은 1926년 11월까지 발행되며 국내외에 독립운동 관련 소식을 전하는 소임을 감당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기능도 했던 상해독립신문을 통해, 만주와 연해주 등을 주무대로 일제와 치열한 대결을 벌이는 임시정부 그리고 독립군의 이야기들이 고국에까지 폭넓게 전파될 수 있었다.

원조격인 ‘독립신문’이 서재필 윤치호와 아펜젤러 선교사 등 기독교인들 주도로 발간되었던 것처럼, 상해독립신문의 발간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여한다. 특히 창간과정에서 도산 안창호와 신한청년단의 역할이 지대했다.

상해독립신문의 창간을 발의하고 주도한 도산 안창호.
상해독립신문의 창간을 발의하고 주도한 도산 안창호.

안창호는 17세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구세학당에 다니며 기독교신앙에 입문했고, 이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신민회 흥사단 등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후배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고초를 치른 후, 미국으로 몸을 피했던 안창호는 3·1운동이 전개되자 상해로 옮겨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다.

상해에 도착한 안창호는 독립운동 소식을 동포들에게 전할 신문 발간을 발의한다. 마침 상해에 머물고 있던 춘원 이광수가 합류해, 함께 <한일관계사료집> 편찬작업을 진행하며 상해독립신문 창간도 준비한다.

상해독립신문 창간 전 이미 상해에서는 <우리소식>이라는 이름의 주간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 <우리소식>의 발간을 주도한 신한청년단은 김규식 여운형 서병호 선우혁 현순 등 기독교인들이 주축을 이룬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 단체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 힘입어 1919년 8월 21일 상해독립신문 첫 호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타향에서 한국어 활자를 구하는 일부터가 문제였다. 다행히 기독교인 독립운동가들이 소장하고 있던 한글성경에서 글자를 채취해 인쇄활자를 만들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3·1절 특집호로 제작된 상해독립신문 제182호.
3·1절 특집호로 제작된 상해독립신문 제182호.

사장 이광수와 출판부장 주요한 등 창간멤버들이 일손을 놓은 채 귀국 후 변절의 길을 걷고, 임시정부와 신문사 사옥이 위치한 상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일본 측의 압력으로 시설폐쇄 명령을 받는가 하면, 극심한 경영난 등의 문제로 여러 차례 발행이 중단되기도 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상해독립신문은 8년 동안이나 활동을 계속하며, 중국어판을 따로 발행하기까지 했다. 신문의 배포는 임시정부 교통국과 연통제에서 주도했으며, 국내에서는 부산 백산상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백산상회는 부산 초량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여러 성도들이 운영에 참여한 민족기업이었다. 연락원들은 자신의 몸에 신문을 숨기고 다니며 암암리에 수많은 애국지사들에게 배포했다.

이 사연 많은 신문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금년 11월 6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앞서 2012년 연세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던 상해독립신문은 등록문화재 150-1호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본은 150-2호로 등록번호가 부여됐다.

“임시정부의 역할과 존재가치를 실증하는 귀중한 사료로서 학술연구·전시·교육 등에 있어 가치가 크다”는 것이 상해독립신문에 대한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한국교회에도 선배 신앙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을 반추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산이다.

 

애국신앙으로 기꺼이 헌신, 추모비에 기리다

②숭실 출신 독립유공자 88명

숭실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대학이라는 타이틀 말고도 또 하나의 자부심이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항일민족운동의 산실이라는 것이다. 숭실 출신 중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인물은 현재까지 88명, 단일교육기관 중 최다인원이다.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한국명 배위량)가 1897년 10월 10일 평양의 자택에서 숭실학당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해, 숭실중고등학교와 숭실대학교로 발전하는 123년 동안 숭실은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수없이 키워내고 그들을 통해 이 땅의 역사를 바꾸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교사들로부터 배운 애국신앙을 가슴에 새기고,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스스로 교문을 닫는 기개를 삶으로 체화한 숭실인들은 각각 임시정부 중책으로, 독립군 일원으로, 신실한 목회자로 겨레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들 인생을 내던졌다.

‘독립의 반석’ 제막식에 숭실대 교내외 인사들이 함께 하고 있다.
‘독립의 반석’ 제막식에 숭실대 교내외 인사들이 함께 하고 있다.

3·1운동 당시 평양의 만세운동 주역이자 조선예수교장로회 제7대 총회장을 지낸 김선두(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내고 대한예수교진정회 회장으로서 국내외를 누비며 활약한 손정도(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항일 민족시인으로 살다간 윤동주(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로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한 조만식(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제주의 위대한 독립운동가 조봉호(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등이 대표적이다.

11월 20일 숭실대학교(총장:황준성) 교정에서는 이들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추모비 제막식이 거행됐다. ‘독립의 반석’이라는 이름을 붙인 추모비에는 88명의 자랑스러운 이름들이 남긴 자취가 새겨졌다.

이날 황준성 총장은 “도탄에 빠진 동포들을 구하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한 선배들의 항일 독립투쟁 DNA는 지금도 숭실의 학생들을 교육하는 데 소중한 자양분이 되고 있다”면서 선배들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적극 계승하고 널리 선양할 것이라고 밝혔다.

코로나19로 제한된 인원만 현장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제막식의 감동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행사 실황이 유튜브를 통해 중계되기도 했다. 시청자들은 ‘애국지사들 덕분에 지금 저희가 여기 있을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등의 댓글로 응원의 마음을 전했다.

지난 수년동안 숭실대학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숭실 동문을 적극적으로 조사하고, 정부에 이들의 공적신청을 해 수많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해내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또한 국가보훈처에서도 독립유공자 훈포장 추서와 추모비 건립 후원 등으로 적극 호응해주었다.

하지만 추모비 건립으로 모든 노력이 끝난 것은 아니다. 숭실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114명의 동문, 1930년 전개된 평양학생만세운동으로 검거된 107명의 학생 등 앞으로도 역사적 조명을 받기에 모자람 없는 수많은 선배를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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