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호남이 기억하는 은인들, 최흥종과 포사이드
[역사기획] 호남이 기억하는 은인들, 최흥종과 포사이드
  • 정재영 기자
  • 승인 2020.12.01 1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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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 최흥종 목사와 미국인 의료선교사 포사이드(한국명 보위렴)는 호남선교역사의 앞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들이다. 복음의 불모지였던 땅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앞장섰거니와, 약한 자들 그 중에서도 한센병자들을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 섬긴 공통점이 있다.
특히 1909년 4월 포사이드가 길가에 버려진 한센병 소녀를 자신의 말에 태워 돌아와 정성껏 보살피고, 이를 가까이서 지켜보던 최흥종을 감화시킨 장면은 대단히 극적이다. 이후 광주 나병원, 여수 애양원, 고흥 소록도 등에서 전개된 한센병 치유사역의 결정적 계기 또한 바로 이들을 통해 만들어졌다.
두 사람이 보여준 헌신과 열정은 그들이 세상을 떠나고 강산이 몇 차례나 바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생생히 살아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신앙과 삶을 기리는 작업들도 후대에 의해 끊임없이 반복된다. 2020년 가을, 두 영적 거인을 회상하는 뜻깊은 발걸음을 따라가 보자. <편집자 주>

 

광주 기독인들, 헌신의 오방정신 계승 다짐

오방 최흥종 목사

10월 7일 광주 금남로 YMCA회관 앞은 인파로 북적였다. 회관 건물과 주변을 ‘광주3·1운동 주역들의 터’로 명명하는 제막식이 열린 것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1919년 3월 10일 바로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조선독립 광주신문>을 배포한 주인공들의 이름이 호명됐다.

당시 지도자로 활약한 인물들 중 첫 번째로 등장하는 이름이 ‘오방 최흥종’이다. 일찍이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회심한 후, 광주 북문안교회에서 초대 장로로 선임된 바 있는 그는 만세운동에도 기독교인 대표로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비록 본인은 서울의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바람에, 광주의 시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광주 만세운동의 실질적인 지휘자로서 일제의 고문 앞에서도 끝내 비밀을 지키며, 당일 시위가 약속대로 성사될 수 있도록 책임을 다했다.

그리고 만세운동을 함께 준비했던 김철 등 기독교인 동지들과 함께 1년 후인 1920년 7월 29일 광주기독교청년회(광주YMCA)를 결성했다. 만세운동을 통해 이루지 못한 조국 독립의 꿈을 향해, 기독청년들의 신앙과 열정을 모아 새롭게 도전해보자는 뜻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다.

창립 100주년을 맞은 광주YMCA의 리더들이 최흥종 목사를 비롯한 광주3·1운동 주역들을 기리며 기념표지 제막식을 열고 있다.
창립 100주년을 맞은 광주YMCA의 리더들이 최흥종 목사를 비롯한 광주3·1운동 주역들을 기리며 기념표지 제막식을 열고 있다.

같은 시기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북문밖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1922년에는 시베리아선교사로 파송되는 등 최흥종에게는 복음사역 만으로도 분주한 나날이 계속됐다. 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 또한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귀국한 뒤 1924년 광주YMCA 제3대 회장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세 차례나 회장직을 맡으며 복음과 조국을 위한 사업들을 선도했다. 특히 한센병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광주YMCA 회관 입구에 세워진 오방 최흥종 목사의 흉상.
광주YMCA 회관 입구에 세워진 오방 최흥종 목사의 흉상.

모두가 꺼리는 한센인 소녀를 외국인 선교사가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모습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선교사들을 도와 광주 나병원 설립에 앞장서며, 이를 위해 자신의 소유지 1000평을 기증하기까지 했다.
멸시 받는 한센인들의 권익수호를 외치며, 1932년 봄 최흥종 목사가 150명의 환자를 이끌고 광주에서 출발해 조선총독부까지 도보로 행군한 이른바 ‘구라(救癩)행진’은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사건이다. 11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할 무렵에는 무려 500명의 한센인들이 동참했다는 이 일을 계기로 소록도병원의 기능이 본격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에는 경양방죽에서 부랑자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룬 신림교회, 거처 없이 지내는 한센인들을 위한 나주 호혜원, 결핵환자들을 구휼하는 송등원과 무등원 등을 세우고 돌보는 데 최 목사는 남은 일생을 바쳤다. 정작 본인은 가정, 사회, 경제, 정치, 종교 등 일체에 욕심을 버리겠다고 선언한 이른바 ‘오방’(五放) 정신은 동료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

광주YMCA가 사회봉사를 통해 기독교정신을 실천하는 이들을 위해 ‘오방상’을 제정한 것이나, 오방기념사업회를 조직해 갖가지 추모사업을 전개하는 이유는 두고두고 오방정신을 계승하자는 다짐 때문이다.
올해로 설립 100주년을 맞은 광주YMCA는 ‘광주3·1운동 주역들의 터’ 제막식 및 거리전시회를 시작으로 오방상 시상식, ‘오방 최흥종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주제의 특별세미나 등의 행사를 잇달아 열며 위대한 선배를 기리고 있다. 지난해에는 광주시 양림동에 ‘오방최흥종기념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고귀했던 사랑의 의술, 마음 속에 각인하다

포사이드 선교사

포사이드 선교사<br>
포사이드 선교사

리모델링으로 깔끔히 단장한 전주 예수병원 외래진료실 벽에 9월 9일 그림 하나가 새로 걸렸다. 성경 스토리와 한국기독교 초창기의 인물들을 소재로 성화를 그려온 최미정 화가가 아크릴화로 제작한 <다시 오신 예수, 포사이드>였다.

그림 속 주인공 포사이드(W. H. Forsythe)는 미국남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로서 1904년 예수병원장에 부임한 인물이다. 2년 전 만화로 제작된 포사이드의 전기 <밝게 타오른 등불>을 출간한 바 있는 예수병원에서, 이번에는 미술작품을 통해 옛 동역자를 추억한 것이다.

예수병원 설립자이자 초대 원장인 마티 잉골드가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사이, 대신 병원을 이끌 적임자로 낙점된 이가 바로 미국에서 갓 입국한 포사이드였다. 초보 선교사에게 주어진 낯선 환경과 중책은 적잖은 무게였겠지만, 그는 타고난 성실함으로 부담을 극복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진료를 시작한 그는 쉬는 법을 몰랐다. 1905년 한 해 동안 그가 진료한 환자의 숫자는 무려 6000여 명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었다. 그 해에 호남 최초의 고아원을 세워 의탁할 데 없었던 이 땅의 아이들을 돌보기도 했다.

1910년 동료 선교사 가족들과 함께 한 포사이드 선교사(맨 뒷줄 왼쪽 끝)의 모습.
1910년 동료 선교사 가족들과 함께 한 포사이드 선교사(맨 뒷줄 왼쪽 끝)의 모습.

그런 고귀한 삶에도 불행은 찾아왔다. 김제의 한 마을에 왕진을 갔다가 하룻밤을 묵는 사이, 숙소에 괴한이 들이닥친 것이다. 강도들의 손에 포사이드는 귀가 심하게 망가지고 두개골이 깨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빈사상태가 되어 전주로 돌아온 그는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미국으로 떠나 제대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섬긴 상대에게 큰 상처를 당한 입장에서는 다시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한국이었겠지만 그는 2년 만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심지어 범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내가 죽지 않았으니 그 사람들도 죄를 묻지 말고 죽이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담당 관리에게 보내 이 땅의 백성들을 감동시킨다.

두 번째로 시작된 한국에서의 사역은 더욱 눈부셨다.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을 주 무대로, 광주와 목포 등 전남 일대를 누비며 수많은 환자를 돌보았다. 그는 단순히 육체의 질병만 다스리는 의사가 아니었다. 자신이 만난 모든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했다.

전주예수병원 진료실 벽에 전시된 최미정 화가의 <다시 오신 예수, 포사이드>.
전주예수병원 진료실 벽에 전시된 최미정 화가의 <다시 오신 예수, 포사이드>.

1909년 4월 4일 동료 선교사 오웬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급히 광주를 향해 가던 길에 만난 한센병 소녀와의 이야기는 포사이드가 어떤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를 온전히 보여준다. 온 몸에 피고름 가득한 채 토굴에서 지내는 소녀를 마주쳤을 때, 가족들조차 외면하는 한센병 환자인 것을 한눈에 알아챘음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타고 있던 말 위에 죽어가는 소녀를 태우고, 정작 자신은 마부 역할을 맡아하며 먼 길을 걸어 돌아왔다. 광주로 돌아와 험한 몰골의 소녀를 손수 품에 안아 내리며, 마치 소중한 보물처럼 보살피는 선교사의 모습은 지켜보던 모든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의 선행은 이후 광주 나병원과 여수 애양원 개원으로 이어졌고, 사람들은 그를 ‘다시 오신 예수’라 불렀다.

이 별명을 작품 이름으로 채택한 최미정 화가의 그림 속에는 바로 포사이드와 한센병 소녀가 서로를 응시하는 순간의 은혜와 감동이 포착되어있다. 김철승 예수병원장은 “병원 한복판에 존경하는 선교사님의 모습이 아름답게 재현되어 기쁘다. 연민을 품고 환자들을 치료한 포사이드의 모습에서 많은 분들이 깊은 감명을 받기 바란다”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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