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신 계승하는 역사적 설립”
박창식 목사(전 총회역사위원장·대구 달서교회)

6·25 전쟁기의 총회신학교 대구 설립은 평양신학교의 전통 계승과 총신 70년 역사의 요람기 개막이라는 의의를 갖는다고 설명하는 박창식 목사.
6·25 전쟁기의 총회신학교 대구 설립은 평양신학교의 전통 계승과 총신 70년 역사의 요람기 개막이라는 의의를 갖는다고 설명하는 박창식 목사.

총회신학교의 설립과 특별히 대구 시절에 대한 역사는 지금까지 어느 자료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총회신학교의 대구 역사는 일시적 공백을 메꾸는 정도가 아니었다. 우선 총회신학교는 혼돈을 거듭하던 장로교회 내에서 교회의 통일과 정통신학을 파수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총회신학교의 대구 시절에 대한 역사적 재구성을 시도해 본 결과 우선 가능한 대로 몇 가지 의의를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총회신학교 대구 시절은 단지 ‘피난신학교’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총회신학교는 전쟁 상황에 피난을 간 학교거나 아니면 임시로 세워진 학교가 아니라, 총회의 결의에 따라 새로이 설립된 신학교였다.

둘째, 총회신학교의 대구 설립은 해방 전후 신학교 정립시대에 장로교회의 통일을 기하고자 하는 교계의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셋째, 총회신학교의 대구 설립은 당시 비등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막기 위한 전국 노회의 염원 가운데 설립된 학교로서, 조선신학교가 독자노선으로 가면서 총회신학교의 설립은 보수신학이 승리한 것을 의미한다.

넷째, 총회신학교 대구 설립은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후 그 신학적인 전통을 계승한 신학교로서 신학적인 정통성을 갖는다. 다섯째, 총회신학교의 대구 설립은 남북 분단 이후 대구가 장로교회의 본산으로 평양을 대신했다는 역사적인 의의의 표출이다.

여섯째, 총회신학교의 대구 시절은 전쟁 중에도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중단될 수 없다는 교회론적인 의지의 강한 표현이었다. 극한 환경에서도 신학을 연마하고 훈련한 자들이 전쟁 후에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는 주역들이 되었던 것이다.

일곱째, 총회신학교 대구 시절은 총신의 요람기로서 그 후 70년간 정체성 유지에 힘이 되었다. 여덟째, 총회신학교 대구 시절은 그동안 선교사들이 중심이었던 신학교가 한국인들에게 리더십이 이양되는 과도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사료된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