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6·25와 한국교회] (1)피난기 대구에서 개교한 총회신학교
[역사기획/ 6·25와 한국교회] (1)피난기 대구에서 개교한 총회신학교
  • 정재영 기자
  • 승인 2020.11.10 16: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성으로 시작된 신학교’ 배움 열기 뜨거웠다
1951년 9월 18일 ‘안전지대’ 대구서 개교식 … 열악한 환경에도 피난민 등 학생 몰려

6·25전쟁 기간의 대구는 피난처이자 방어선의 상징과도 같았다.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도 이 시기 대구에 많은 신세를 졌다. 동란 중에도 신학생 양성 사역을 방치할 수 없었던 총회는 전쟁 발발 이듬해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를 개교했고, 조국과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대구·경북의 젊은 기독인들이 주축을 이룬 십자군의용대를 창설했다. 이들의 대구 활동기는 비록 2~3년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후 우리 사회와 복음의 계승자들에게 미친 파급력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총회역사위원회에서 임원으로 활동하며 신학교에서 역사신학 교수로 봉직해 온 박창식 목사(달서교회)와 김병희 목사(서변제일교회)가 6·25 발발 70주년을 기념해 각각 대구 총신과 십자군의용대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본 지면에서는 앞으로 두 주에 걸쳐 해당 논문을 중심으로 대구 총회신학교 시절 및 십자군 의용대에 관련된 이야기들과 오늘의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6·25 전쟁기에 대구서문교회당에서 문을 연 총회신학교의 개교기념 사진.
6·25 전쟁기에 대구서문교회당에서 문을 연 총회신학교의 개교기념 사진.

6·25 발발 이듬해인 1951년 5월 부산중앙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다시 열렸다. 한 해 전 개회한 제36회 총회가 경남노회 총대문제로 비상정회 한 후, 전쟁이 터지면서 1년 넘게 속개되지 못하다가 비로소 다시 부산에서 회집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총회에서 가장 큰 화두는 바로 신학교 문제였다.

‘총회신학교’라는 글씨가 선명히 새겨진 대구 시절 정문 현판.
‘총회신학교’라는 글씨가 선명히 새겨진 대구 시절 정문 현판.

수년 간 총회 안에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라는 두 직영신학교가 양립하며 커다란 불안요소로 작용했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이 크게 번져가는 조선신학교에 대한 우려가 커져가고 있었다. 이를 정리해 하나의 신학교로 운영하자는 주장이 여러 노회에서 설득력 있게 제기되어 논의되는 중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전국 방방곡곡이 전쟁터로 변해버려, 누가 생존해 있는 지조차 알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했다. 총회의 결론은 안전지대인 대구에 새로운 직영신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해 9월 18일 대구서문교회에서 신학교 개교식을 열었다. 새로운 학교의 이름은 ‘총회신학교’였다. 정식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교’였지만, 편의상 줄여 ‘총회신학교’로 불렸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총신’이라는 익숙한 명칭의 기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교장으로는 미국북장로교 소속 아치볼드 캠벨(한국명 감부열) 선교사를 선임했다. 그는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후 1916년에 내한해 평안북도 강계를 중심으로 사역하다 신사참배 반대로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 

하지만 해방 직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대구 계명대학교 초대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양 진영이 예민하게 대립각을 세우던 시기에 원만한 성품을 지닌 외국인을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세운 것은 절묘한 선택이었다.

1952년에 대구에서 촬영한 총회신학교 본과 1학년 학생들과 교수들의 단체사진.
1952년에 대구에서 촬영한 총회신학교 본과 1학년 학생들과 교수들의 단체사진.

감부열 교장을 위시해 권세열 조하파 선교사와 박형룡 김치선 명신홍 계일승 박사 등으로 교수진을 꾸렸다. 교수들은 각자의 전공과목을 충실하고도 깊이 있는 수준으로 가르치는 한편, 6·25라는 국난의 책임이 신사참배라는 과오의 결과라면서 통렬한 회개를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자연히 수업시간에는 회개와 눈물이 넘쳐나곤 했다는 게 당시 재학생들의 회고이다.

‘포성으로 시작된 신학교(It opened with a bang)’라는 감부열 교장의 표현처럼 불안정한 시국에서 개교한 학교였기에 모든 환경이 열악했다. 전선이 대구로부터 불과 11km 떨어진 곳에 형성되는가 하면, 어느 날에는 포탄이 신학교 교정까지 날아올 정도로 위협이 끊이지 않았다. 피난민이 끝도 없이 밀려와 건물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고, 물자는 모자란 상태였다.

총회신학교 대구 시절 권세열 선교사가 강의하는 모습.
총회신학교 대구 시절 권세열 선교사가 강의하는 모습.

일단 교실이 부족했다. 대구서문교회당을 본과 교사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학생 기숙사와 예과 학생들의 수업공간은 따로 구해야 했다. 수소문 끝에 간신히 대구중앙교회당 일부를 기숙사로, 서남교회당을 예과 교사로 확정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칠판도, 교재도 없이 교수의 강의를 받아 적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당시 학생이었던 고 김종석 원로목사(군산 개복교회)는 생전에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학생들은 마루에 주저앉아 등받이 없는 긴 의자를 책상 삼아 공부했다. 기숙사는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군불을 때보지 못한 온돌방이었고 기숙사 밥이라고는 아침과 점심뿐이었는데, 양은그릇에 흰쌀 한 그릇과 콩나물 열대여섯 개 혹은 가느다란 시래기 열서너 가닥이 들어있는 국물이 전부였다.”

1953년에 열린 총회신학교 제2회 졸업식.
1953년에 열린 총회신학교 제2회 졸업식.

그럼에도 총회신학교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왔다. 당초 200~300명쯤으로 예상한 등록학생의 숫자는 서류미비 등의 이유로 100명 가량을 돌려보냈음에도 무려 519명에 이르렀다. 숫자상으로 당시 장로교신학교 중 세계 최대라 할 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학생들 중에는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제38회 총회에 보고된 1952년의 총회신학교 통계에 의하면 전체 494명의 재학생 중 평양노회 소속 83명, 황해노회 소속 50명, 평서노회 소속 27명 등 이북 출신들이 약 4분의 3 가량의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권세열 선교사의 전기 <씨를 뿌리러 나왔더니>에서는 “그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자비하게 순교당한 이들”이라고 기술한다.

그렇게 엄청난 사연과 배경을 지닌 학생들은 수업시간에는 진지하게, 경건회 시간에는 거룩하게, 부흥회 시간에는 뜨겁게 임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배움의 나날들을 채워나가며 훗날 한국교회의 융성기를 이끄는 지도자들로 자라났다.

대구 시절을 마감한 총회신학교는 서울 남산으로 이전해 역사를 이어간다.
대구 시절을 마감한 총회신학교는 서울 남산으로 이전해 역사를 이어간다.

1953년 9월 2일에는 박형룡 박사가 총회신학교 제2대 학장이자 한국인 최초 학장으로 취임하고, 다시 그로부터 한 달 후에는 서울 남산으로 총회신학교 이전이 이루어진다. 이후로도 무수한 신자(信者)를, 학자(學者)를, 성자(聖者)를, 전도자(傳道者)를, 목자(牧者)를 길러낸 선지동산의 첫 장은 이렇게 활짝 열렸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많이 본 기사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