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율 목사의 사진묵상-성령의 열매]

그 동안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경험을 한 필자는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라는 문제에 대해 관심이 깊어졌다.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수술 전날 담당의사로부터 ‘내일 수술하다가 잘못되면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라는 말 한 마디를 듣고 난 후 밤새 잠을 못 이뤘다. 그러다 문득 병실 창밖의 가로등 밑을 지나가는 행인을 바라보며, 나도 저렇게 다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죽음 앞에서 찾아오는 불안과 두려움은 목사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의 공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죽음 앞에서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여전히 연약하기에 죽음 앞에서 항상 담대하지는 못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순교자들만이 아니라 바울이나 베드로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했다.

마가복음 4장 35~41절에 보면 죽음의 광풍 앞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이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하면서 주무시는 예수를 깨우는 장면이 나온다. 마가는 말씀으로 광풍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지를 다음 구절에서 묘사하는 놀라운 사건과, 그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의 반응으로 설명한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막 4:39~41)

종착역에 도착하면 아무리 비싸고 좋은 좌석에 앉아있던 승객이라도 예외 없이 모두 내려야 한다. 그렇듯 지금까지 수많은 재산과 지식과 명예와 권력을 얻으며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 타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사람이라도 죽음 앞에 서면 그 모든 것들을 놔둔 채 이 세상의 삶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때 가서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지금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자. 잘못한 일에는 ‘미안해’하며 용서를 빌고, 받은 사랑에는 ‘감사해’하고, 미워한 상대에게 이제는 ‘사랑해’라고 말하는 ‘삼해운동’을 시작하자. 남은 삶이 더 행복할 것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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