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1970년의 11월 13일은 매우 안타까운 날이었다. 평화시장 봉제공장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이 스스로를 불태웠다. 청춘을 불사르듯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하던 근로 현장에 대한 그의 고발 방식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매우 선진적인 근로기준법이 있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고 청계천 평화시장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언론이 다루기 시작했다. 교회 조차 품지 못했던 그 아픈 현장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죽음이 그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코로나19로 인해 배달이 늘어나면서 택배노동자의 줄을 잇는 사망. 거기에 더하여 산재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전근대적인 현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일부 택배회사들이 사과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발표하는 등의 조치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제발 그렇게 되면 좋겠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 역시 얼마나 많은 죽음의 족적을 남겼는가. 아카시아 꽃향기로 가득해야 할 교정이 최루탄 냄새로 얼룩지면서 꽃 같은 청춘들이 그 봉오리도 피지 못한 채 스러졌다. 남산, 남영동 분실 등으로 상징되는 반인권과 반민주의 폭력으로 새벽이 올까 싶었지만 그래도 어느새 동이 텄다.

그러나 아직도 곳곳에서 이어지는 죽음들. 죽어도 해결 안 되는 일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니! 지하철 정비 하청업체의 젊은 일용직, 열악한 환경의 화력발전소 노동자의 죽음은 도대체 언제쯤 끝날까. 죽음으로도 바뀌지 않아 누군가의 가슴이 피멍이 드는 이 세상을 살아내려니 죄책감으로 가슴이 쫄아 들면서도 어느새 적응해 가는 듯하다. 얼마나 더 죽어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 죽어야 해결되는 세상은 예수님으로 끝이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 분의 죽으심으로 난 이렇게 살았고 새로운 세상을 누리고 있는데 이 세상은 여전히 눈물이 마르지 않으니. 이젠 그 분으로 인해 살아난 우리가 죽어야 할 차례일 텐데 내 안의 그 놈, 이기적 욕망은 참 질긴가 보다.

돈 욕심, 이것 하나만 죽으면 끝나는 것인 줄 알면서도 그 욕망 덩어리는 끊어내기가 참 힘들다. 하긴 천국을 보여주어야 할 교회조차도 벗어버리지 못한 욕망이니. 세련된 예배당의 LED조명은 오래된 네온사인보다 훨씬 선명해졌지만 교회는 아직도 흐릿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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