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소위 ‘스카이(SKY)’로 불리는 대학이 있다. 학교 이름의 영어 이니셜을 조합하였는데, 영어 단어의 의미로는 ‘하늘’이다. 정말 세상의 서열상으로는 하늘처럼 높아 보인다. 그야말로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학 아닌가? 수능 응시자 대비 2.5% 정도만 가는 학교다. 서울대는 0.5% 정도니.

그런데 그 대학에 가는 학생들의 55%가 고소득층의 자녀들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그 중 서울대만을 따지면 63%나 된다. 여기서 고소득층이란 부모의 소득이 상위 20%에 해당되는 계층을 말하는 것이다. 비슷한 통계는 꾸준히 상승하면서 고정되는 느낌까지 든다.

가난을 딛고 열심히 공부하여 그 최고라고 말하는 학교에 들어가고 사회적 수직 상승의 발판을 만들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개천에서 용 나기’는 매우 힘들게 되었다. 신분과 경제적 능력의 고정, 대물림이 굳어진 것 같아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르지 않는가?

교육은 사다리에 비유되곤 했다. 높이 오를 사다리, 그래서 우리나라 대학진학률은 60% 이상이다. 2005년 82.1%를 정점으로 매년 낮아지더니, 2016년 70% 선이 무너지고 이제는 60% 중후반에 머물고 있다. 대학이 높이 오를 사다리 역할조차 제대로 못하는 탓이다.

진학률 저하는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지만 분석은 단순하지 않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진정한 스카이를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서야만 ‘루저’가 아니라는 대사가 아직도 기억되는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생각난다. 과연 스카이는 무엇일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의미의 하늘을, 땅의 욕망의 최고점으로 생각하는 이 천박한 가치관이 문제가 아닐까?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우리들조차 이 땅의 ‘스카이’에 집착하는 듯해 참 답답하다. 땅에서 올라가고 싶은 허망한 스카이가 아닌,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진 진정한 ‘스카이’에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신앙교육이 과연 이뤄지고 있는지. 상위권 대학에 가지 않아도 가치관과 도덕성, 인생관과 세계관이 높은 그런 인생을 꿈꿔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그 높은 스카이에 올라가 앉는다 한들 결국 추락의 충격만 가중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참 착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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