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뿌리 같은 형제, 다시 한 몸 이룬다”
 역사적 소명, 난관 헤치고 마침내 결실


형제들아,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2005년 9월 27일, 믿음의 형제들이 다시 모였다. 1979년 제64회 총회에 분열했던 예장합동과 예장개혁이 26년 만에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고 15년이 지났다. 그동안 총회는 한 몸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내려놓고, 어떤 노력을 했을까?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7)는 말씀처럼 경건과 형제 우애, 사랑을 위한 총회의 모습을 살펴본다. 또한 건강한 미래를 위해 형제가 어떤 사랑을 세워가야 하는지 모색한다.
<편집자 주> 

“출발” 교단합동 논의의 출발점이 된 2003년 증경총회장단 위로회. 교단 원로들은 합동의 당위성에 공감했다. 사진속 20명 중 현재 생존해 계신 분은 4명 뿐이다.

2003년 11월 6일 증경총회장단 위로회
2003년 11월 6일 오후, 증경총회장단 일행을 태운 대형버스가 88올림픽고속도로 초입인 남원 주천면에 접어들자 총회총무인 이재영 목사가 마이크를 잡고 진지하게 말문을 열었다.
“개혁 측이 우리와 합동을 원한다면서 만나자고 합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증경총회장들을 모시고 지리산호텔에서 온천을 겸한 위로회를 가는 길목에 이 총무의 돌발 발언은 충격이었다. 어느 누구도 말이 없었다. 이윽고 증경부총회장 우성기 장로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 우리가 편목도 받아 교육을 실시하는 마당에 박형룡 박사의 보수신학을 지향하는 광주 개혁 측이 합동을 하자 했으면 일단 만나 봅시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우 장로의 발언에 냉랭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나이드신 교단의 증경총회장들이 갑자기 이구동성으로 만나라도 보자고 한 목소리를 냈다. 그날, 저녁을 먹고 몸이 불편해 승용차 편으로 오신 증경총회장 몇몇 분들 사이에 또다시 개혁 측과 합동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정기총회가 끝나고 밤 늦은 시각, 새벽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상경하는 서기행 목사를 모셔다 드리기 위해 구례역으로 향했다.
“서 부총회장님, 개혁 측과 합동이 가능할까요?”
서기행 목사는 아무 말이 없다가 무궁화호 서울행 막차를 타기 직전, “형제가 합한다는데 잘 만나야지요. 하나님이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고 했다.

“첫 만남” 교단합동을 위한 양 측 위원회의 2004년 첫 모임. 총 14명이 자리를 함께 한 이 모임에서 합동의 기대는 커져갔다.

2004년 5월 27일 ‘첫 만남’
2004년 5월 27일 낮 12시 팔레스호텔, 합동 측 개혁교단영입위원회(위원장:서기행 목사) 초청으로 개혁 측 합동추진위원회(위원장:김정중 목사)와 합동을 위해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서기행 목사는 “신앙뿐만 아니라 정신적‧인격적으로 동질성이 가까운 개혁 측과 합동을 추진키로 했다”며, “박형룡 박사의 신앙을 전승하고 있는 진정한 보수교단 끼리의 만남이기 때문에 합동이 기대가 된다”고 밝혔다.
김정중 목사는 “1979년 분립된 상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늘 죄송했는데 마음을 비우고 원만하게 합의를 이끌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상견례 차원의 이 자리에는 합동 측 서기행 최기채 최성구 김용길 이재영 목사 권영식 신원종 장로, 개혁 측 김정중 변한규 변남주 윤낙중 박갑용 목사 주영철 김상술 장로 등 14명이 참석했다.
이후 같은 해 6월 11일 광주 가족회관에서 총회장 임태득 목사와 박갑용 목사를 비롯한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두 번째 모임이 열렸다. 양 측 대표는 서로 합의안을 도출하여 가을총회에서 합동방안을 상정하기로 했다.
한편 이날 회동에 정규오 목사가 참석해 서로 짐이 되지 않도록 잘 합동하도록 격려하고 위로했다.

2005년 7월 26일 정규오 목사를 만나다

교단합동의 의의를 강조하며 격려했던 92세 정규오 목사는 합동을 지켜본 후 이듬해 소천했다.

2005년 7월 26일 오전 6시 50분 용산역, 약속시간보다 빨리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홍정이 목사가 먼저 나와 계셨다. 아침식사라며 미리 준비한 빵과 우유를 건넸다. 아랫사람을 대하는 배려가 따뜻했다.
무등산 헐몬수양관을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곳에 정규오 목사가 누워 계셨다.
“저는 분열주의자였습니다. 어느 한 쪽에 손해가 가더라도 합동은 해야 합니다.”
비록 92세의 육신은 곤비했지만 말 한 마디, 한마디는 또렷했다. 김준곤 목사가 그 해 봄에 찾아와 결자해지 하고 합동 측과 합하라고 권면했다는 얘기도 잊지 않았다. 김의환 목사를 비롯하여 많은 목회자들이 합동을 권했으며, 본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양 교단이 합동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말도 빼놓지 않으셨다.
정 목사는 합동 측과 개혁 측은 신학과 신앙의 뿌리가 같기 때문에 헤어질 이유가 전혀 없다며, 생각이 다소 다르다고 합동을 깨는 행위는 결코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개혁교단에서 합동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제 분열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습니다. ‘합동총회’의 광경을 휠체어라도 타고 가서 봤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정 목사 허락 하에 유언처럼 들려주시던 음성을 녹음하고, 비록 초췌한 모습이지만 사진도 찍었다. 그는 교단지가 왜곡되지 않고 본인의 뜻을 잘 전달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기도 했다. 양 교단이 합동할 것을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고 원하고 있었다.
정규오 목사는 그의 원대로 2005년 9월 합동 측과 개혁 측이 합동하는 모습을 보고, 이듬해 1월 19일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2005년 8월 8일 총회회관 회의실
개혁 측과 합동을 반대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각종 단체와 기구에서 성명서가 잇따르더니 급기야 교회갱신협의회를 중심으로 소위 ‘총회 사태에 대한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2005년 7월 25일 <기독신문> 전면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당시 여러 사안과 함께 개혁 측과 합동을 반대한다는 여론의 절정이었다.
이와 관련 총회임원회는 8월 8일 당시 <기독신문> 사장을 불러 소위 비대위의 조직 및 주장을 게재한 경위를 듣고 사과를 받았다. 이틀 뒤 서기행 총회장 명의의 담화문이 발표됐다. 총회는 절대로 흔들림 없이 개혁교단 영입을 총회의 역사적 사명으로 알고 하나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 다시 총회임원회를 소집하여 제90회 총회장소를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대전중앙교회로 변경했다. 제90회 총회를 불과 40여 일 앞두고 원천적으로 총회를 보이콧 하자는 얘기까지 돌아 교단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한편 개혁 측에서도 합동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극에 달했다. 합동 측의 영입에 굴욕적이라는 인식과 함께 굳이 편목 취급을 당하는데 합동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젊은 목회자들의 반대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결실” 2005년 9월 27일 대전중앙교회서 서기행 총회장(왼쪽)과 홍정이 총회장이 교단합동 결의를 하고 있다.

2005년 9월 27일 마침내 ‘합동총회’ 성사되다
2005년 9월 27일 대전중앙교회, 합동 결의직후 개혁 측 총대들이 입장하자 합동 측 총대들이 기립하여 박수로 환영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홍정이 목사를 비롯한 많은 분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제 분열의 종지부를 찍고, 한국교회와 세계복음화에 앞장서자고 다짐했다.
설교를 맡은 증경총회장 박요한 목사는 “자꾸 눈물이 나서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 것 같다. 단합된 힘으로 세속주의와 배금주의를 배격하고 각종 부정과 이단사이비를 물리치자”고 역설했다. 제90회 총대일동은 “지난 날의 실수를 뉘우치고 한국교회에 참 모습을 보여주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새 역사를 이뤄가겠다”는 선언문도 발표했다. 특히 선언문은 바른 신앙과 전통을 계승할 교단의 이정표를 세우고, 분열의 아픔을 통해 분산보다 협력을 강조하여 의미가 높았다는 평가다.
이로써 합동 측과 개혁 측의 합동은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양 교단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하에 이루어진 일대 사건으로서 지금도 한국교회사에 기적으로 등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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