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새롭게 살아가는 은혜 제시한다

1. 성찬의 제정

우리 주 예수는 밀고를 당하신 밤에 주의 만찬(성찬, Coena Domini, the Lord’s Supper)이라고 불리는 자기 몸과 피의 성례를 제정하셔서 자기 죽음 가운데 자기 자신을 드리신 제사에 대한 영구적인 기념을 위하여, 참 신자들을 향한 모든 은총에 대한 인침을 위하여, 자기 안에서의 그들의 영적인 양육과 자라감을 위하여, 그들이 자기에게 빚지고 있는 모든 의무를 더 잘 맡아 수행함을 위하여, 세상 마지막까지 자기 교회에서 지켜지게 하셨으며, 그들이 자기의 신비한 몸의 지체들로서 자기와 그들 그리고 그들 서로 간의 교제의 고리와 서약이 되도록 하셨다. 이 성례에서 그리스도가 자기 아버지께 바쳐지는 것도 아니고,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죄사함을 위한 어떤 실제적인 제사가 드려지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것은 그가 십자가에서 전적으로 단번에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바치신 것에 대한 기념이며, 동일한 이유로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올려드릴 수 있는 모든 찬양의 영적인 봉헌이다. 그러므로 소위 미사라는 로마 가톨릭 제사는 택함 받은 자들의 모든 죄에 대한 유일한 용서인 그리스도의 단 하나의 제사에 가장 혐오스러운 해를 끼친다.”(29.1~2)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신약의 성례는 오직 두 가지, 세례와 성찬이다. 세례는 옛 것이 새 것으로 살아남의 은혜를, 성찬은 새 것이 되어 살아감의 은혜를 제시한다. 세례가 성도의 그리스도와 연합의 시작의 표라면, 성찬은 그 연합의 계속의 표이다. 시작이 없는 계속이 있을 수 없으므로, 세례를 받지 않은 자는 성찬을 받을 수 없다.

구원론적 관점에서 보면, 물을 표징으로 삼는 세례는 단회적이고 법정적으로 일어나는 거듭남(중생)과 칭의의 단계에 상응하므로 단 한 차례 종국적으로 베풀어지는 반면, 떡과 잔을 표징으로 삼는 성찬은 계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성화의 단계에 상응하므로 이생의 삶이 끝날 때까지 누차 베풀어진다. 교회론적 관점에서 보면 세례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되는 단번의 입교에 상응하는 반면, 성찬은 교회의 지체로서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날마다 자라감에 상응한다. 요컨대 세례의 씻음은 하나님의 자녀와 교인의 신분을 ‘얻음’을, 성찬의 먹음과 마심은 그 신분을 ‘누림’을 의미한다.

성찬은 그리스도 ‘자신의 몸과 피의 성례’(sui corporis et sanguinis sacramentum, the sacrament of his body and blood)이다. 그리스도는 예언된 말씀에 따라 우리 모두 죄악에 대한 징벌을 대신 담당하시고자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사람이 되셔서 질고와 고난과 슬픔과 징계 가운데 자기 자신을 속건제물로 삼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셨다(사 53:4~6, 10, 히 4:15, 빌 2:8, 마 20:28). 성찬은 그리스도가 이러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심을(마 3:15, 요 19:30) 기억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영적인 봉헌’(oblatio spiritualis, spiritual oblation)이다. ‘기념’(commemoratio, commemoration)은 이 세 가지를 아우른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

성찬은 성육신하신 주님이 그 몸과 피 가운데 죽으심, 부활하심, 그리고 지금 현존하셔서 우리 생명의 떡과 음료가 되심을 기념한다. 주님의 그 몸과 그 피가 성찬의 실체(substantia, substance)이자 실제(veritas, truth)이다. 성찬의 떡을 받음은 그 몸에 참여함이며, 잔을 받음은 그 피에 참여함이다(고전 10:16). 그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므로 그의 생명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요 1:4, 6:53~54, 56, 11:25, 14:6, 요일 1:1~2). 그 떡과 잔이 하나이므로 그것들에 참여하여 그와 한 몸과 한 피가 된 우리는 서로 간에 한 몸과 한 피를 이룬다(고전 10:17, 12:13). 여기에 성찬의 수직적 차원의 의미와 수평적 차원의 의미가 있다.

2. 성찬의 요소와 거행

주 예수는 이 규례에서 자기 사역자들을 지정해서 그들이 사람들에게 그 제정의 말씀을 선언하고, 기도하고 떡과 잔의 요소들을 축복하며, 이로써 그것들의 통상적 사용으로부터 거룩한 사용을 구별하며, 떡을 취하고 떼고 잔을 취하며, 자신들 또한 받으면서, 그 둘 모두를, 당시 회중 가운데 없는 자는 그 누구도 말고, 수찬자들에게 주게 하신다. 사적 미사나 이 성례를 사제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 혼자 받는 것은 사람들에게 잔을 주는 것을 거절하는 것, 그 요소들을 예배하는 것, 그것들을 들어 올리거나 숭배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가지고 다니는 것, 어떤 가장된 종교적인 사용을 위하여 그것들을 보존하는 것과 같이 모두 이 성례의 본성과 그리스도의 제정에 배치된다.(29.3~4)

성찬의 거행은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하신 ‘제정의 말씀’(verbum institutionis, the word of institution)에 따라야 한다. 성찬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거행되어야 하며, 회중 가운데 없는 자는 받을 수 없다. 말씀 선포권이 그렇듯이 성례 거행권도 목사에게만 있다. 성례에는 분병(分餠)과 분잔(分盞)을 통한 떡을 먹음과 잔을 마심이 각각 있어야 한다. 성찬이 표징인 떡과 잔이 제시하는 실체는 주님의 살과 피이므로, 떡과 잔을 들어 올리거나 가지고 다니거나 특별히 보존하거나 하면서 그것들 자체를 종교적으로 예배하거나 숭배해서는 안 된다.

3. 성찬의 비밀: 실제적 그러나 영적 현존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사용에로 적절하게 구별된 이 성례의 외적 요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와 참으로 그러나 오직 성례적으로, 관계된다. 때때로 그것들은 그것들이 표상하는 것들의 이름에 의해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체와 본성에 있어서 그것들은 여전히 참으로, 그리고 오직 이전에 그랬듯이 떡과 포도즙으로 남는다. 사제의 축성이나 어떤 다른 방법에 의해 떡과 포도즙의 실체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의 변화를 주장하는 통상 화체설이라고 불리는 교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심지어 상식과 이성에도 일치하지 않고 성례의 본성을 전복시키고 다양한 미신과 더하여 난잡한 우상숭배의 원인이 되어 왔고 지금도 그렇다. 합당한 수찬자는 이 성례에 있어서 가시적 요소들에 외적으로 동참하면서 또한 믿음으로 내적으로, 사실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러나 육체적이고 물질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의 모든 은총을 받고 먹고 자란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당시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떡과 포도즙 안에, 함께 아래에 있지 않고 실제적으로 그러나 영적으로 그 규례대로 신자들의 믿음에, 그 요소들 자체가 그들의 외적 감각에 그러하듯이, 현존한다. 비록 이 성례에서 무지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외적 요소들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로써 표징된 것을 받지 않고 그들이 합당하지 않게 그곳에 나아옴으로 주의 몸과 피에 죄를 범하며 그들 자신의 저주로 나아간다. 따라서 무지하고 불경건한 모든 사람은 그들이 그와의 교제를 즐김에 부적합한 것처럼 주의 상에 합당하지 않으며 그들이 그렇게 머무는 한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큰 죄 없이 이 거룩한 비밀들에 동참하거나 그것들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29.5~8)

주님은 성찬을 제정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받으라, 먹으라,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나의 피니라”(마 26:26~28, 고전 11:24, 막 14:22~24; 눅 22:19~20).

여기서 떡과 잔이 살과 피‘이다’ 함은 떡과 잔이 살과 피를 ‘상징한다’ 함도 아니고, 떡과 잔이 살과 피로 ‘변한다’ 함도 아니며, 살과 피가 떡과 잔 ‘안에, 함께, 아래에 있다’함도 아니다. 각기 이런 주장을 펴는 쯔빙글리의 상징설, 로마가톨릭의 화체설, 루터란의 공재설은 비성경적이다.

오직 칼빈과 그를 잇는 개혁신학자들의 영적 임재설이 성찬 제정의 말씀에 정확히 부합하는바, ‘이다’라고 함은 그리스도가 ‘사실로 그리고 실제적으로’(revera et realiter, really and indeed) 현존하시되, ‘육체적이고 물질적이 아니라 영적으로’(non canali aut corporeo sed spirituali, not carnally and corporally but spiritually), 즉 ‘성례적으로’(sacramentaliter, sacramentally) 현존함을 뜻한다.

성례는 표징, 말씀의 제정, 성령의 역사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성령의 역사로, 말씀에 따라, 믿음 가운데, 떡과 잔의 표징을 받는, ‘영적인 먹음과 마심’에 성찬의 비밀과 효력이 있다. 그리스도는 인성에 따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신성에 따라 모든 곳에 계시는, 한 위격 두 본성의 중보자이심으로, 그 위격적 연합의 비밀 가운데 성도는 성찬의 떡과 잔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영적으로, 먹고 마신다. 우리는 이 비밀을 이해하기보다 찬미하도록 해야 한다. 이 한 몸 됨의 비밀이 크고도 크다(엡 5:32).


※ 각 단락 서두에 볼드체로 인용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본문은 라틴어 본에 비춘 필자의 번역이므로 그 이하의 내용과 다름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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