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24)영주 연당교회
[역사기획/ 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24)영주 연당교회
  • 정재영 기자
  • 승인 2020.08.31 2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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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년 세월을 마을과 함께 한 영주 연당교회. 오래된 예배당에는 그 긴 세월의 자랑스러운 기억들이 간직되어있다.
112년 세월을 마을과 함께 한 영주 연당교회. 오래된 예배당에는 그 긴 세월의 자랑스러운 기억들이 간직되어있다.

가문의 헌신, 112년 복음 역사 지켜오다
설립자 강두수 믿음의 모범, 후대 신앙에 결정적 영향 … 열악한 환경에도 뿌리 이어

경북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는 안동과 영주를 잇는 5번국도 주변에 숨어있다. 깊은 연못을 연상시키는 지형이라 하여 붙여진 ‘연당’이라는 두 글자는 교회이름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연당교회(강경희 전도사)는 이곳에서 112년 세월을 마을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영주지역에서는 두 번째로 1908년 탄생한 신앙공동체이다.

설립자 강두수 영수의 가문에서는 4대가 이어가며 연당교회를 지켜왔다.
설립자 강두수 영수의 가문에서는 4대가 이어가며 연당교회를 지켜왔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는 연당교회 설립자로 강두수 영수를 지목한다. 영주사람 강두수는 관리 출신의 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라다, 스무 살에 어느 주막에서 ‘영생’이라는 제목의 쪽복음을 읽고 감동받은 후, 대구로 찾아가 만난 서양인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됐다. 그에게 복음을 전한 인물은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북장로교 소속 제임스 에드워드 애덤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였다.

이후 강두수는 자신의 마을로부터 걸어서 약 3시간 거리에 있는 안동 방잠교회에 다니며 신앙을 키웠다. 예배를 위해 수십 리 길을 오가다, 같은 지역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서로 의기투합해 자신들의 동네에 새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다.

강두수가 그렇게 고향에 먼저 세운 교회는 지곡교회, 영주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교회였다. 지신마을 임재봉의 사랑방에서 첫 예배를 시작한 지곡교회는 이후 경신학교를 설립해 인재들을 키우고, 옹천교회 등 여러 교회들을 분립 개척하는 등 복음의 요람으로 맹활약한다.

그런데 지곡교회가 세워진지 불과 1년여 만에 강두수는 두 번째로 연당교회를 세운다. 거리상으로도 매우 인접한 곳에 굳이 다시 교회를 설립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교남 목사(예천전원교회)는 자신이 집필한 <연당교회사>(한국기독교교회사주영연구소)를 통해, 대체로 역사가들은 강두수 집안에서 벌어진 신앙적 핍박을 가장 큰 원인으로 여긴다고 설명한다.

이웃 교회에서 힘들게 찾아낸 연당교회 당회록은 설립 전후의 연대기로 시작한다.
이웃 교회에서 힘들게 찾아낸 연당교회 당회록은 설립 전후의 연대기로 시작한다.

이교남 목사의 조사에 의하면 강두수는 예수 믿기 시작하면서 가족들, 특히 아버지로부터 무수히 박해와 고난을 받았다. 집에서 쫓겨나고,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지금도 유교의 영향이나 제사문화가 강력하게 남아있는 지역이니 100년 전 그가 맞닥뜨린 상황은 어떠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연당교회 설립은 핍박을 피해 거처를 마련하고, 신앙생활도 지속하려는 강두수의 고육지책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랜 핍박 가운데도 강두수의 신앙은 흔들림이 없었다. 완고한 아버지를 향해 끝까지 사랑으로 행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강대상에서 설교하던 중에 일본말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인 순사에게 끌려 내려오며 심한 매를 맞기도 했지만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설립자의 모범은 연당교회의 동역자들, 특히 가족들의 신앙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가 당한 온갖 수난을 두 눈으로 목격하며 자란 아들 강대은 목사는 경안성경학교 졸업 후 목회자가 되어 3년 동안 연당교회에서 시무했다. 아버지를 폭행했던 그 순사가 훗날 다시 찾아와 잘못을 빌고, 원수나 다름없던 그를 아버지가 기꺼이 용서했다는 스토리는 마치 소중한 가보처럼 대대로 전해졌다.

힘겨운 환경에서도 꾸준히 신앙의 명맥을 이어가는 연당교회 교우들.
힘겨운 환경에서도 꾸준히 신앙의 명맥을 이어가는 연당교회 교우들.

그리하여 손자들인 강현원은 장로로서, 강성원과 강덕원은 목사로서 각각 충성스럽게 하나님나라의 청기기로 살아갔다. 이중 강성원은 총신을 졸업하고 역시 연당교회에서 잠시 사역한 바 있으며, 지금은 강두수의 증손인 강경희 전도사가 4대째 교역자로서 섬기는 중이다. 형제 사이인 강석진 목사(금천소망교회) 강성천 목사(대구주영교회) 등도 자신들의 믿음의 뿌리가 건재하게 설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동역한다.

이들 가문의 헌신으로 연당교회는 일제가 초가 예배당을 불태워버리는 핍박, 한동안 문을 닫고 지곡교회와 병합되는 수난, 산간오지라는 열악한 목회환경 때문에 교역자들이 수시로 바뀌는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버틸 수 있었다.

지금이야 농촌의 쇠퇴와 함께 교세도 크게 줄었지만 설립 직후만 해도 세례교인 15명을 비롯한 30여 명의 성도가 출석했다는 경안노회록의 기록이 존재하고, 19년이나 이 교회에서 사역한 김영재 전도사의 회고에 따르면 주일학교 학생들이 100여 명에 이르던 시절도 있었다.

그 모든 기억들은 일제강점기에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예배당, 그리고 예배당 곳곳에 마련된 추억의 사진들과 어렵게 되찾은 낡은 당회록, 손 때 묻은 강대상과 이제는 소리가 나지 않는 풍금 등으로 꾸며져 마치 추억박물관과도 같은 공간들 속에 남아있다.

제105회 총회에서 연당교회가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될 것이라는 기대는 연당교회에 대한 기억을 지금도 공유하는 이들에게 참 반가운 소식이다. “연못 깊이 가라앉은 듯 숨어버렸던 교회의 자취가 다시 떠올라 세상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를.” 이들은 간절히 희망한다.

“열심히 공동체 지키는 것이 사명”
고향 돌아와 교회 일으킨 강경희 전도사

강경희 전도사에게 연당교회는 과거의 추억이자, 현재의 일터이며 내일의 소망인 존재다.
강경희 전도사에게 연당교회는 과거의 추억이자, 현재의 일터이며 내일의 소망인 존재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의 교회당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외관부터가 손가락으로 툭 밀면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더니, 살포시 열어본 예배실 내부는 온통 거미줄투성이였다. 가슴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강경희 전도사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엉엉 울어버렸다.

“어릴 적 내 신앙의 보금자리였던 곳, 부모님과 일가친척들 그리고 동네친구들과 함께 했던 믿음의 공동체가 퇴락해버린 모습에 정말 마음 아팠어요. 그 순간 깨달았죠. 주님이 저를 이곳으로 다시 부르셨다는 사실을.”

고향 교회에서 사역하는 일이 처음부터 내켰던 것은 아니었다. 안동노회로부터 급하게 찾는 연락이 왔을 즈음에는 나이 60줄을 바라보며 전도사 직책에서 은퇴할 생각을 하던 중이었고, 이미 다른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총신대에서 사회복지학 수업을 한창 받던 참이었다.

그러나 100년 넘게 이어져온 복음의 요람이자, 집안 4대의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연당교회의 명맥을 자신의 대에서 끝나게 할 수는 없다는 책임감이 그의 마음을 붙잡았다.

이렇게 돌아온 강경희 전도사는 5년째 연당교회 강단을 지키고 있다. 오래 전 사람들로 북적이던 동네에는 어느새 여덟 가구 밖에 남지 않았고, 출석하는 성도들 숫자도 예닐곱 명에 불과했다. 이웃들도 마냥 환대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설교소리와 찬송소리가 시끄럽다며 몇 차례 예배당을 뒤집어 놓은 주민도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주일이면 손수 지은 밥으로 교우들과 식탁교제를 나누고, 이웃마을들까지 다니며 전도하는 나날들로 강 전도사는 무너져가던 교회에 새 숨결을 불어넣었다. 연로한 마을어르신들의 손발이 되어 함께 장을 보고, 이곳저곳 여행도 다니며 친분을 쌓다보니 서서히 사람들 마음이 열렸다.

사례비가 나올 리 없으니 손수 농사를 지어 먹을거리를 마련하고, 쥐들이 득실대는 빈 집을 고쳐 쓰며 진짜 마을의 일원이 되었다. “예수님 때문에 참고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의 진심을 이제는 모든 이웃들이 인정한다.

코로나19로 온 세상이 정신없던 2002년에도 강 전도사는 예년과 다름없는, 오히려 더욱 분주한 한 해를 보냈다. 위태하던 예배당 주변 축대를 다시 쌓고, 간판을 새로 달았으며, 숙원이던 승합차를 장만했다. 가족과 지인들이 보내주는 꾸준한 후원이 큰 힘이 된다.

“예순셋이나 먹었는데 마을에서 제가 가장 젊은 나이랍니다. 그러니 어르신들 한 분 한 분 다 잃지 않고 천국으로 인도해드리는 게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교회를 제 것으로 여기는 교만함 품지 않고, 주님이 허락하시는 날까지 청지기의 마음으로 열심히 섬기렵니다.”

연당교회 예배당 벽에는 강 전도사 자신의 추억과 염원을 담아 써 붙인 시 한 수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자세로 교회를 지키는 그의 마음이 예쁜 글귀들처럼 정겹다.

‘내 어릴 적 옛 고개 잿대백 밑 작은 마을/새벽종 때 엎드린 할머니의 기도응답/자손만대 주의 종 피로 세운 연당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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