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26년 전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임시목사로 부임하여 8개월쯤 지난 후 위임투표를 했다. 단 한 표의 반대가 있었다. 위임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고 모두 박수 치며 기뻐했다. 단 한 명의 반대. 그것은 분명 소수의견에 불과할 수 있다. 웃어넘길 수도 있었지만 26년 동안 그 한 표를 잊은 적이 없다. 늘 가슴에 안고 산다. 누군지 모를 그 한 사람에 대한 원망은 결코 아니다. 그 한 표는 늘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그 덕에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동의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그러기에 그 한 표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리라.

내가 하는 일이나 나 자신에 대해 한 명도 반대가 없기를 바란다면 매우 위험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만장일치는 무효다>라는 책도 있지 않은가. 문화비평가 변정수가 2003년에 썼다. 그 주제는 이미 <탈무드>에도 다룬 것이라 한다. 유대 의회 즉 산헤드린은 회의 중 만장일치가 나오면 오히려 그것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고, 다음 날까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가 다시 결정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만장일치를 감정적인 판단으로 보았으며, 다른 의견이 없는 사회를 결코 건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수의견, 그것에는 누구도 생각 못한 지혜가 담길 수도 있다. 따라서 그럴 수 있다며 존중해야 한다. 처음에는 소수의견이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다수의견이 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늘 소수였다. 마이너그룹이었던 것이다.

‘왜 늘 반대만 하지?’ 그러면서 그를 밀어내고 미워하면 하나님의 뜻을 놓칠 수도 있다. 소수의 생각을 곱씹다 보면 그럴듯한 이유가 보일 때도 있지 않은가? 소수의견에 대한 열린 태도가 결국 공동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고, 그런 지도자가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어왔다. 각각 다른 소리를 엮어 합창을 만드는 지휘자처럼.

지금 생각해도 26년 전 단 하나의 선명한 ×표는 복이었다. 오늘도 나를 불편하게 하는 또 다른 그 ×표를 본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생각에 깊이를 더해주며 기도시간을 늘려준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표를 피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생떼 쓰듯 달려드는 소수의견에는 단호하게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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