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부름에 순종, 오롯이 선교사 길을 가다
명예ㆍ출세의 삶과 거리두며 미지의 대륙서 헌신 … 총회차원서 고귀한 행보 기억해야

제54회 총회는 1969년 10월 10일 역사상 없던 일 한 가지를 했다. 미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다. 미국이 어떤 곳인가. 청교도의 나라,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있게 한 장로교회 감리교회들의 산실이 아니던가. 복음의 메신저에게 복음을 역수출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 된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가 차남진 목사를 공식 제1호 미국선교사로 보내면서 발급한 임명파송장. 현재 아들 차종율 목사가 소장 중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가 차남진 목사를 공식 제1호 미국선교사로 보내면서 발급한 임명파송장. 현재 아들 차종율 목사가 소장 중이다.

당시 사상 첫 공식선교사로 미국에 파송된 주인공은 고 차남진 목사였다. 차남진 목사의 3남 차종율 목사(새순교회 원로)가 최근 공개한 아버지의 선교사 임명 파송장은 일부 물에 젖어 글씨가 번지기는 했지만 당시 차 목사의 사진과, 당시 총회장 문재구 목사와 선교부장 양화석 목사의 서명 등을 비교적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문재구 목사는 과거 차남진 목사가 목사 임직을 받을 당시 선배로서 직접 안수를 담당했던 사이인데, 훗날 총회장으로서 선교사 파송장을 수여하는 역할까지 했으니 인생행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참 각별한 존재였던 셈이다.

차남진 목사는 1915년 광주시 방림동에서 태어났다. 선교사들이 세운 광주양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해 순천 장천교회와 순천동부교회 등에서 사역하고, 순천고등성경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6·25전쟁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유니온신학교 프린스턴신학교 콜롬비아신학교 등지에서 수학했다. 1960년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는 총신 교수를 지내는 한편, 김준곤 목사와 함께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사역하며 청년들을 신앙으로 일깨우고, 전국에 기독대학생네트워크를 조직하는 일에 공헌했다.

명예와 출세 그리고 치부(致富)의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늘 그것들과는 거리를 두었던 것이 차남진 목사의 삶이었다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말한다. 자녀들 학비를 대는 데도 힘겨워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고, 며칠씩 열심히 부흥회를 인도한 뒤 미역 한 다발이나 쌀 한 봉지를 사례비 대신 건네받는 것만으로 몹시 고마워했다는 일화들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그 기간에 담임했던 서울 부암동의 삼애교회에서도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그리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자는 종교적 신념을 고스란히 실천했다.

1969년 10월 10일 열린 차남진 선교사의 파송식 모습. 앞 줄 가운데가 차 선교사이다.
1969년 10월 10일 열린 차남진 선교사의 파송식 모습. 앞 줄 가운데가 차 선교사이다.

차종율 목사는 어릴 적 자신의 집에 종종 드나들며 아버지와 나란히 밥상을 받던 걸인들이나 한센병 환자들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 배경에 고인이 어릴 적부터 광주에서 보고 자란 유진벨 오웬 윌슨 포사이드 쉐핑 등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섬김 모델이 있었다고 아들 차 목사는 말한다.

“전라도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선친께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한 걸음도 내딛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나라 우선으로 일관하신 삶을 믿음의 스승들로부터 고스란히 물려 받으셨으니 말입니다.”

본인이 마음만 먹었다면 눈앞으로 다가왔을 법한 총신 교장(오늘날의 총신대 총장)이라는 엄청난 기회를 마다한 채, 총회의 부름대로 미국선교사라는 미지의 영역에 뛰어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차량 하나에 먹을거리며 옷가지 등 살림도구들을 죄다 실은 채, 혼자 운전하며 거대한 대륙 이곳저곳을 누비는 생활은 방랑자의 나날과 다를 것이 없었다. 지도 하나에 의존하여 인디언보호구역을 복음 들고 찾아다니는가 하면, 연락이 닿는 교회나 공동체가 생기면 동서남북 어디든 쫓아다니는 일이 일상이었다.

행여 작은 후원금이라도 생겼다 하면 고스란히 고국의 빈한한 농어촌교회들을 섬기는 사업에 죄다 바쳤다. 1974년 결성한 한국성서선교회를 통해서 차 목사가 도운 국내 농촌 어촌 산촌 등지의 교회들 숫자가 부지기수이다. 서울 내곡동에 집단 거주하던 한센병환자의 미감염 자녀들을 위해 후원금을 보내고, 고아들의 해외입양을 주선하는 사업에도 앞장섰다.

영어로도 해박한 지식과 어휘를 동원하여 가르치는 설교와 강의들에 미국 현지 교회들에서도 몇 차례 청빙요청이 왔으나, 자신에게 사명으로 주어진 선교사의 자리만을 끝까지 고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마르다 사모와 슬하에 둔 다섯 아들이나 제자들에게도 기회만 되면 “편하게 목회하려고 하지 말고, 선교사 정신으로 살라”고 가르쳤다. 총신대 정정숙 교수, 아세아연합신학대 김영욱 총장, 증경총회장 홍정이 목사 등이 그렇게 차 목사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긴 인물들이다.

1979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선교사로서 차 목사의 삶은 한결 같이 신실했다. 당시 총회가 주류 비주류로 나뉘어 극한투쟁을 벌이던 암흑기였던 탓에, 그를 쓸쓸히 떠나보내야 했던 세월이 한스러울 뿐이다.

이제 낡은 파송장 하나, 몇 편의 선교보고서로 세상에 남은 그의 사명과 사역을 어떻게 우리 기억 속에 보존할 수 있을까. 총회역사위원회와 총회세계선교회(GMS) 등 유관기관들이 앞장서 이 위대한 믿음의 선배가 걸어간 고귀한 인생행보를 기념해줄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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