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야 한다

1. 안식일과 주일의 성수(聖守) 

기도뿐만 아니라 종교적 예배의 다른 아무 부분도 지금 복음 아래서는 그 드려지거나 수행되는 어떤 장소로 인해 얽매이지도 않고 더 많이 받아들일 만하게 되지도 않는다. 진정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즉 가족들은 날마다 집안에서, 각자는 홀로 은밀하게, 공적인 집회들에서는 더욱 엄숙하게, 영과 진리로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공적인 집회들은, 하나님이 자기 말씀이나 섭리로 부르실 때에, 부주의로나 고의로나 소홀히 여겨지거나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적정한 분량의 시간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할애하는 것이 자연의 법이듯이, 하나님은 자기 말씀으로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실정적, 도덕적, 영구적 계명에 따른 의무를 부과하셨으니, 특별히 칠일 중에 하루를 안식일로 지정하셔서 자기에게 거룩하게 지키도록 하셨다. 이 안식일은 세상의 태초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주간의 첫째 날로 바뀌었다. 이 첫째 날은 성경에서 주의 날이라고 불리며, 기독교 안식일로서 세상 마지막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이 안식일은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을 올바르게 준비하고 사전에 그들의 일상사들을 정돈한 후 자기들의 세속적인 생업과 오락에 관한 그들 자신의 일과 말과 생각으로부터 종일 거룩한 쉼을 지킬 뿐만 아니라 주님에 대한 예배의 공적이고 사적인 실행과 필연적인 의무와 긍휼의 의무에 전체 시간을 들이게 될 때 주께 거룩하게 지켜진다.”(21.6~8)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예배는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요 4:21~24). 예배는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모여서 드리되, 그 장소나 시간을 섬기는 것은 아니다(갈 4:10~11).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창조를 마치고 안식하셨으며, 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창 2:1~2, 출 20:11). 안식일은 하나님이 자신의 것을 사람에게 베푸시는 복된 날이자, 사람이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날이다. 하나님의 베푸심과 사람의 드림이 함께 할 때, 안식일의 거룩한 쉼이 있다.

안식일은 창조의 질서이자 규례로서, 그 성수가 제4계명을 통하여 재차 확정되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신 5:12) 이는 창조의 때와 같이 일곱째 날은 ‘여호와의 안식일’이므로, 엿새 동안은 힘써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그날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라는 것이다(출 20:10~11, 신 5:13~14). 그 쉼 가운데 우리 자신을 여호와께 온전히 드려 그가 우리 속에서 마음껏 일하시는 복을 누리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일시적인 의식법(儀式法)이 아니라 항구적인 도덕법(道德法)이다. 안식일 성수는 언약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예배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표한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구약의 안식일은 신약의 ‘주의 날’(主日)로서 완성되었다. 안식의 목적은 언약의 열매인 영생에 있으며, 영생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죽음으로써 죽음을 죽이시고 부활하신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의미한다. 주님은 안식일 후 첫날 부활하셨고(막 2:27),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그리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뵌 것도 그 첫날이었다(마 28:1, 막 16:9, 요 20:19). 이 점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가 되심을 선포하는 부활의 증인들로서(행 3:15) 부활이 없으면 안식도 없고 구원도 없음을 확신하며(고전 15장) 매주 첫날을(행 20:7, 고전 16:1) 그리스도가 완전하게 하신(마 5:17, 롬 10:4),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시는 안식일로서(마 12:8) 지켰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일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른 자들이 그 은혜를 누리며 찬미하고 송축하는 예배의 날이자(계 1:10), 그가 다시 오셔서 심판하심으로써 종말에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대망하는 날이었다(살전 5:2, 살후 2:2, 벧후 3:10).

주일은 날을 위한 날이 아니라 주의 백성을 위한 날이다(막 2:27). 주일성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값없이 부여되는 하나님의 자녀의 복을 온전히 누림에서 비롯되므로 이를 빌미로 어떤 자질이나 공로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주일에는 ‘종일 거룩한 쉼’(quies sancta toto die, an holy rest all the day)이 있어야 한다. 이는 생업과 오락에 관한 일과 말과 생각을 그치는 데 머물지 않고, 모든 시간을 드려 ‘공적인 예배’와 ‘사적인 예배’를 실천하는 데 미쳐야 한다(대요리문답 117, 소요리문답 60~61). 그러므로 주일에는 예배, 말씀, 기도, 찬양에 힘쓸 뿐 아니라, 선을 행하고 긍휼을 베풂이 마땅하다(마 12:12).

2. 하나님이 받으시는 맹세

합법적 맹세는 종교적 예배의 한 부분이다. 그것이 공정한 경우에 맹세하는 사람은 엄숙하게 하나님을 불러 자기가 주장하거나 약속하는 것을 증언해 주시고 자기가 맹세하는 것의 참과 거짓에 따라 자기를 심판해 주시도록 한다.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써 맹세해야 한다. 선하고 정당한 어떤 것에 대하여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된 맹세를 거절하는 것은 죄이다. 맹세는 모호함이나 심중유보(心中留保) 없이 분명하고 통상적인 어의(語義)로 해야 한다. 그것은 죄를 짓도록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악하지 않은 어떤 것에 있어서 할 때에는 비록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이행을 고수해야 한다. .”(22.1~4)

자구적 의미를 좇아 엄밀히 정의하자면, 맹세(iuramentum, oath)는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약속이고, 서원(votum, vow)은 사람이 하나님께 하는 약속이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그 약속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점과 그 실행을 하나님의 능력과 뜻과 섭리에 맡긴다는 점에 있어서 서로 다름이 없다.

합법적 맹세는 전능하시고 편재하시며 절대 의와 선과 주권을 지니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의 삶을 두고, 그를 경외하고 섬기며 의지하는 가운데, 옳고 그름에 따라 그런 것과 아닌 것을 명백히 분별해서, 진실과 공의와 정의로 해야 한다(마 26:63, 신 6:13, 10:20, 마 5:37, 약 5:12, 렘 4:2). 이방신이나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이나 사람의 머리로 하는 맹세는 허탄하고 거짓되며 한낱 미신과 우상숭배에 불과하다(렘 5:7, 약 5:12, 마 5:33~36). 하나님은 자기의 공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의 진리 가운데 복을 구하는 자의 맹세를 들으시고(사 45:23, 65:16), 그것에 대한 증인이 되실 뿐만 아니라(롬 1:9, 고후 1:23) 그것에 대한 맹세를 자기에게 하시고 친히 그것을 이루신다(히 6:13~18).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예배와 함께, 예배의 일부로서, 맹세를 요구하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렘 5:7, 수 23:7).

3. 하나님이 받으시는 서원

서원은 약속을 담은 맹세와 동일한 본성에 속하며, 동일한 종교적 주의를 기울여 발해져야 하며 동일한 신실함을 지니고 수행되어야 한다. 서원은 어떤 피조물에게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발해져야 한다. 서원이 받아들여지려면 자발적으로, 믿음과 직분의 양심에서, 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함을 표하거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발해져야 한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에 금지된 어떤 것이나, 그곳에 명령된 어떤 직분을 방해하게 되는 것이나, 자신의 권세 가운데 있지 않는 것이나, 그 실행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어떤 약속이나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행하고자 서원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평생의 독신, 서약된 가난, 규칙적 순종에 대한 로마 가톨릭 수도서원(修道誓願)은 더 고상한 수준의 완전함과는 아주 동떨어진 미신과 사악한 올무들로서 어떤 그리스도인도 그것들에 자신을 연루시켜서는 안 된다.”(22.5~7)

서원은 약속을 담은 맹세로서, 무슨 맹세를 내세워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실지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슨 일을 이루시리라 확신하면서 무엇을 맹세하는 것이므로, 제한적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감사를 표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 그러므로 대체로 서원의 제물은 자기 자신을 드리는 번제와 자기의 삶을 드리는 낙헌제와 함께 감사의 제물로서 드려진다(레 22:18, 민 15:3, 신 12:11, 시 50:14, 56:12). 서원의 약속을 그대로 지켜야 하는 불변성과 필연성은 서원하는 자의 공로나 자질이 아니라 서원을 받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변개치 않으심에 기인한다. 이렇듯 하나님이 받으시는 서원은 필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약속은 필히 지켜져야 한다(민 30:2~16; 신 23:21~23; 삼상 1:11, 시 15:4, 61:1~8; 전 5:4~5, 나 1:15). 이런 맥락에서, A. A. 핫지가 간파하듯이, ‘보이지 않은 은혜에 대한 보이는 표징’으로서의 성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The Westminster Confession: A Commentary, 291).


※ 각 단락 서두에 볼드체로 인용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본문은 라틴어 본에 비춘 필자의 번역이므로 그 이하의 내용과 다름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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