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부총회장)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앙적 자산과 신학적 유산은 예배다. 한국교회는 예배를 통해서 기적 같은 부흥을 이뤘다. 예배에는 찬양, 기도, 헌상이 있지만 개혁주의 예배의 꽃은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 예배에서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루돌프 오토가 말한대로 설교는 단순히 하나님의 언어를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다. 설교자가 강단에 올라가는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강력하고도 압도적인 신적 경험을 해야 한다. 이걸 두려운 신비라고 한다. 설교자가 두려운 신비를 느낄 때 청중에게 전율과 매혹이라는 반응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데이빗 버트릭은 설교 행위가 하나님의 신비의 가장 자리에서 춤추는 사역이며 이 땅에 복음을 펼쳐 보이는 비범한 사역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설교는 항상 청중을 향하여 성령의 언어적 임재사건이 되어야 하고 성령의 발화사건이 되어야 한다. 이런 설교를 하면 청중이 졸 수가 없다. 그리고 딴 짓을 하거나 딴 생각을 할 수 없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이 성령의 임재사건이 되고 성령의 발화사건이 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설교자가 설교행위를 하는 동안 온 청중은 기쁨에 젖든지 회개하는 사건이 일어나든지 해야 한다. 언어학 이론에서도 언어를 사용할 때 세 가지 언어 행위가 일어난다고 한다.

첫째, 단순발화 행위다. 수사학으로 말하면 지식적인 로고스, 표면적인 내용, 콘텐츠를 말한다. 둘째, 의미수반발화 행위다. 내용의 진정성, 진정한 의미 등을 말한다. 성경으로 말하면 단순발화 행위는 문자로 기록된 성경 자체 내용을 말한다면, 의미수반발화 행위는 그 본문을 기록한 하나님의 마음과 기록자의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다.

셋째, 효과수반발화 행위다. 성령이 임재하고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소위 말하면 거룩한 설교적 퍼포먼스를 통하여 성도들이 웃거나 울거나, 감격의 춤을 추거나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감동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성령의 나타남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고전 2:4). 그런데 의미수반발화 행위에서 효과수반발화 행위로 가는 과정에서 에토스적이고 파토스적인 외침과 행위가 있어야 한다. 세상의 가인도 습관적으로 노래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한다고 하지 않는가. 한 곡, 한 곡에 마음이 울컥하지 않고 가사, 가사에 마음을 담지 않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하물며 설교는 어떻겠는가.

그런데 대부분 우리의 설교는 단순발화 행위나 의미수반발화 행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정형화된 틀 안에서 말이다. 강단을 통하여 청중에게 효과수반발화 행위가 나타날 때 생명력이 넘친다. 개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 총회도 서로 긴장하고 충돌하는 경직성을 풀고 생명력이 넘치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교회 세움이 총회 세움으로 연결되었으면 좋겠다. 총회도 결국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부름 받은 사람들의 성총회가 아닌가. 105회 총회는 정치적 긴장과 정죄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지 말고 넘치는 생명력으로 하나님께 춤추는 총회로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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