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석 목사(광주 중앙장로교회)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 중심적 신앙 회복합시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왕상 18:37)

고상석 목사(광주 중앙장로교회)
고상석 목사(광주 중앙장로교회)

우리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허락하셨던 부흥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깊이 타락하고 잠들었을 때 혹은 국가적인 방탕의 시기에 역설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멀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하고 자신들이 듣기에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육체적으로는 늙을지라도 영적인 것이나 하나님과 관계된 데 대해서는 결코 노쇠해지면 안 될 것입니다.

구약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타락하고 침울하고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 한 사람을 세우시고 당신의 놀라운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가정 공동체 그리고 사회 속에서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으시고, 그 한 사람이 주님께 반응하고 나아가면 그를 기적적인 부흥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그때’의 부흥이 오늘 ‘이때’에도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나는 부족하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사용해주신다면 다윗이 들었던 물맷돌이 될 수 있고, 모세가 들었던 지팡이가 될 수 있고, 시대를 밝히는 일꾼과 교회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믿음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은 북이스라엘 7번째 왕이었던 아합의 시대입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아합이 북이스라엘 초대 임금인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다고 했습니다. 더 거슬러 가면 그 근원에는 솔로몬의 타락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타락이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증폭시키는 뿌리 깊은 원인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지혜를 구하였던 솔로몬마저도 타락하고 신앙이 쇠해지면서, 그 뒤로부터 나라가 안정되지 않고 대적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1. 우리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지금 혹시라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미지근한 신앙 상태에 빠져 있다면 그게 바로 우리가 영적인 덫에 걸려든 것임을 명심하고, 날마다 깨어서 우리의 심령을 경성시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전에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결단하였던 그 눈물과 열심들이 다 어디에 갔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순종과 충성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결 같다고 과연 자신할 수 있습니까?

솔로몬이 타락하자 사방에서 대적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열왕기상 11장 26~40절 말씀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부요를 누리는 이유가 내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결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솔로몬의 행실은 하나님께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 다윗을 보시고 솔로몬의 당대까지는 그 영광을 빼앗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전히 때 묻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지파에 ‘내 이름’을 두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면 복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순수성이 남아있는 한 지파에다가 당신의 이름을 둘 것이라시며,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왕상11:36)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열왕기상 16장 29절 이하의 내용을 쭉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울, 다윗, 솔로몬 말기까지 통일왕국 시절에는 한 민족이었고 형제였고 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서로 연합했고, 같이 힘을 합해 대적들과 전쟁했고, 같이 울고 서로 나눠주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죽은 후에는 여로보암을 주축으로 한 북부 지파들의 반란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분열하였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7대 왕으로서, 주전 874년 왕위에 올라 사마리아에 머물며 22년간 통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악한 왕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29절 이하를 보니까 아합의 죄가 세세히 열거되어 있는데, 성경은 그가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가볍게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왕상 16:31). 아합은 이 유명한 이세벨을 아내로 삼은 때부터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열왕기서를 읽다보면 여러 왕들을 평가할 때 비교되는 모델로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하나는 좋은 모델인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임금들에게 ‘내 종 다윗’을 닮았다고 하셨습니다. 선하고 믿음이 좋거나, 혹은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자 했던 왕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 종 다윗을 본받아’라고 전제하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나쁜 왕의 모델은 여로보암이었습니다. 악한 왕들에 대해서는 ‘여로보암을 닮았다’고 언급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여로보암을 닮은 이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2. 우리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열왕기상 12장 28절 말씀을 보면 여로보암은 자기 스스로 법을 정해 더 이상 남쪽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갈 것이 없다고 명을 내렸습니다. 여로보암은 나라의 분열로 북쪽 이스라엘의 큰 지역을 자신이 차지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드리고자 남쪽 유다로 갔다가 혹 거기에 머물고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적 마귀가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 성전 중심의 신앙을 갖게 되면 자기 자리가 위험해지겠다 싶어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대신 이스라엘 경내에 있는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들을 만들어 여기에서 절하라고 하며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고 가르치기까지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름이 다르고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 안에도 얼마든지 이런 형태의 비뚤어진 신앙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 힘이 없을 때는 필요를 느끼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도움을 구합니다. 그런데 돈이 생기고, 명예가 생기고, 권력이 생기고,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된 자리에 섰다 싶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의 바른 길을 걷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생활하기를 원한다면, 처음 받은 은혜와 더불어 말씀대로 걸어가는 신앙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산당들을 짓는 것으로도 부족해, 레위 자손이 아닌 다른 지파의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으며 절기도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정한 신앙생활!’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혹시라도 우리가 그러한 길을 걷고 있다면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으로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열왕기상 14장 1~9절을 보면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이 들었습니다. 이때 여로보암은 자기 아내를 변장시켜 몰래 실로에 가서 아히야라는 선지자를 만나게 했습니다. 아히야는 과거에 여로보암에게 왕이 될 것을 예언해주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한 동안 하나님을 업신여기다가 아들이 죽을 지경이 되어 급해지니까 그제야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십시오. 자기가 불리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는 없을까요? 사업이 망하니까 쫓아왔다가 다시 회복되면 떠나버리며, 집안이 복잡하고 자녀들이 아프고 힘들 때만 하나님을 찾는 모습들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전 왕들이 지은 죄악이 아합이 저지른 죄악과 비교하면 마치 아무것도 아닐 정도라고 고발합니다. 그처럼 아합의 죄악은 중대하고 심각했습니다. 아합이 ‘여로보암의 길’로 대변되는 우상숭배의 행위를 가볍게 여긴 것도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멸시한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사는 날 동안 온전히 주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경외(敬畏)’라는 말은 두렵고 떨림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고백을 죽을 때까지 숨 쉬는 매 순간마다 외치면서 살아갑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미천한 우리들을 사용하셔서, 세상의 모든 어둠의 권세와 죄악과 저주를 끊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동안 혹시라도 여로보암처럼 걸어갔다면 회개합시다. 겸손하게 처음 사랑을 잊어버리지 말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또한 나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쓰시겠다면 순종하리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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