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태 목사의 오목조목 대구골목 이야기]

오목조목 대구골목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했던 두사충이라는 사람을 기억하는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두 차례에 걸쳐 명나라의 지관으로 참전했던 사람이 바로 두사충이다. 이순신 장군과도 막역한 사이였던 두사충은 충무공이 한산도에 주둔할 때 함께 지내며 친분을 쌓았다.

노량해전에도 함께 참전을 했는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그의 묏자리를 잡아주었다고도 전해진다. 두사충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는 명나라로 돌아갔었지만, 정유재란이 끝났을 때에는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귀화했다.

타향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도 자신의 본향을 그리워한 명나라 사람 두사충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을 떠올린다.
타향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도 자신의 본향을 그리워한 명나라 사람 두사충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을 떠올린다.

그런데 두사충은 왜 조선에 귀화했을까? 명나라의 미래를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사충은 오랑캐인 청나라의 백성으로 살기보다, 차라리 조선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귀화를 선택한 것이다. 그가 귀화한 후 ‘하루에 천 냥이 난다’는 명당자리를 자신의 집터로 선택하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경상감영공원 자리이다.

1601년(선조34년) 경상감영이 안동에서 대구로 옮겨오자, 두사충은 자신의 집터를 반납하고 계산동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계산동 뽕나무 골목에서 한 어여쁜 과부를 만나 속칭 ‘님도 보고 뽕도 땄던’ 것이다.

두사충은 조선에 살면서 자신의 호를 ‘모명(慕明)’이라고 바꾸었다.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조선에서 결혼도 하고, 일가를 이루며 살았던 두사충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명나라는 머지않아 망하게 될 나라였지만, 두사충에게는 여전히 본향이었다. 자신과 후손들의 안위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음에도 두사충은 여전히 본향을 그리워했다.

경상감영공원과 뽕나무 골목을 걷고 난 후, 반월당역에서 대구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담티역에서 내리면(혹은 차량으로 20분정도 이동하면) 두사충의 후손들이 세운 모명재를 둘러 볼 수 있다. 모명재의 기둥에는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에게 써 준 한시(漢詩)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두복야에게 바친다)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복야는 두사충의 관직이다.

모명재 산길을 걷다보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지,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사모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망하는 나라인 명나라마저도 본향으로 사모했던 두사충을 보면서 더 이상 본향을 사모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이 땅에서의 풍족함에 취해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비단 나만의 부끄러움일까?

우리가 사모하는 본향은 명나라처럼 멸망해버리는 세상의 나라도 아닐진대, 우리는 왜 이 땅에 더 큰 소망을 두는 것일까. 장차 우리가 상속받는 나라는 영원한 승리가 있는 하나님나라임을 다시 상기하는 장소가 바로 모명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명나라 사람을 기리는 모명재에서 나는 하나님나라를 더욱 사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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