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신앙 기억하며 또다른 유관순 키워가라
옥중서 숨 거두며 ‘나라에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유일한 슬픔’이라 기도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서대문형무소 안에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소리의 진원지는 유관순이 수감되어 있는 여성옥사 8호 감방이었다. 이날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딱 1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으로 공주지방법원에서 7년(혹은 5년)형을 선고받았던 유관순의 형기는 1919년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의 2차심에서 3년으로 줄었다. 상급심 항소를 포기함에 따라 3년형이 확정되었고, 기결수로서 유관순의 서대문형무소 생활이 시작되었다.

유관순의 최후 거처가 된 서대문형무소의 여성옥사.
유관순의 최후 거처가 된 서대문형무소의 여성옥사.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서울 서대문 현저동에 설치된 교도소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박경목 관장은 <식민지 근대감옥 서대문형무소>(일빛)에서 “서대문형무소는 ‘형기 10년 미만의 남자’와 ‘무기 또는 유기의 여자’ 가운데 주로 사상범이 수용되었던 곳으로 여타 감옥과 다르게 사상범 수용을 목적으로 했다”고 기록하면서, 이런 특징 때문에 늘어나는 독립운동가를 감당하기 위해 대대적 감옥시설 확장 조치도 했음을 언급한다.

전국적인 만세운동 후 서대문형무소 여성옥사에는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었다. 특히 유관순이 포함된 8호 감방의 수감자들은 그 면면이 굉장했다.

여성옥사 8호 감방은 유관순을 비롯한 애국여성들이 목숨을 건 또 하나의 항거 공간이었다.
여성옥사 8호 감방은 유관순을 비롯한 애국여성들이 목숨을 건 또 하나의 항거 공간이었다.

개성북부교회 전도부인 어윤희, 호수돈여고 기숙사 사감이자 전도사 신관빈, 유치원 교사 권애라, 시각장애인 심명철 등은 개성만세운동을 이끈 인물들이었다. 구세군 사령 부인인 임명애는 파주에서, 기생 출신인 김향화는 수원에서 각각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붙들려왔다. 그 중 임명주는 체포 당시 임신한 상태였다.

이들은 일사각오의 비장함과 조국독립을 향한 희망찬 염원으로 옥중에서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게 있는 것 아니냐’고 용감히 따지던 유관순의 기개는 옥중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거의 매일처럼 만세를 불렀고, 그 후에는 어김없이 간수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바로 옆 감방에 수감되어있던 스승 박인덕이 몸 상한다고 제자 유관순을 만류해야 할 정도였다.

유관순 열사의 서대문형무소 수형표.
유관순 열사의 서대문형무소 수형표.

면회는 허용되지 않았다. 부모와 오빠가 이미 사망했거나 투옥 중이었으므로 유관순을 찾아 올 가족이 있을 리 만무했고, 친구들의 면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암리학살사건을 만천하에 알린 스코필드 선교사가 서대문형무소 방문 길에 우격다짐으로 여성옥사를 찾아들어가고 유관순 등을 만난 것이 외부인의 면회였다.

단절의 고통, 폭력의 공포 앞에서도 유관순을 비롯한 옥사의 여성들은 꿋꿋이 싸웠다. 1920년 3월 1일 일어난 옥중 만세운동은 그 절정이었다. 8호 감방에서 시작된 함성은 점점 다른 방으로 퍼져나가더니 나중에는 전 수감자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치는 시위로 확대됐다. 바깥에서도 그 우렁찬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무지막지한 보복이 여성들을 덮쳤다. 잔혹한 고문을 당한 유관순은 하루가 멀다 하고 기절한 채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감방으로 돌아오곤 했다. 형무소 마당에 머리채를 잡혀 끌려 나가서는 뭇매를 맞기도 했다. 끝끝내 대들며 저항한 유관순에게는 더 혹독한 매질이 가해졌다.

망우리공동묘지에 조성된 이태원무연분묘에는 화장된 유관순의 시신도 함께 잠들어있다.
망우리공동묘지에 조성된 이태원무연분묘에는 화장된 유관순의 시신도 함께 잠들어있다.

그해 9월 28일 형기 만료를 눈앞에 두고 유관순은 결국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방광파열로 밝혀졌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이라고 기도하던 유관순은 기어이 하나 뿐인 목숨을 조국 앞에 바치고 말았다.

시신은 10월 12일이 되어서야 수레에 실리고 거적에 덮힌 채 유족에게 인도됐다. 열사의 석방을 고대하며 친구들이 준비했던 새 옷은 수의로 바뀌고 말았다.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는 이화학당 월터 선교사와 김활란 교사, 그리고 오빠 유우석 등 소수 인원들만 참석이 허락된 유관순의 장례예배가 거행됐다. 그녀의 묘소는 이태원공동묘지였다.

대한민국정부가 2019년 유관순 열사에게 추서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대한민국정부가 2019년 유관순 열사에게 추서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하지만 이태원공동묘지는 일제에 의해 1935년부터 군용기지로 변용되며 파헤쳐졌고, 유관순의 시신은 다른 2만8000여 구의 시신들과 함께 화장되어 망우리공동묘지로 옮겨진 무연고분묘 안에 갇혀 버렸다. 열사의 존재는 그렇게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애국소녀의 모습을 기억하는 여러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문학과 예술 속에서 그를 되살려냈다.

그녀의 고향마을, 다니던 학교, 거사 현장인 아우내장터, 최후의 거처가 된 서대문형무소까지 사적지로 다시 부각됐고, 망우리공동묘지의 분묘 곁에는 2018년 ‘유관순 열사 분묘합장 표지비’라는 표식이 새로 설치됐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열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가, 지난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그 격을 높였다.

다음세대들도 유관순을 기억하도록 기성세대가 도와주는 방법은 간단하다. 열사가 품었던 믿음, 열사가 걸어간 애국의 길을 우리가 따라 걷는 일, 바로 이 시대의 유관순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신앙과 삶만이 100년 후에도 이 땅과 교회를 지킬 또 다른 유관순을 키워낼 수 있다. <끝>

[‘유관순 연구소’를 찾아가다]

‘신앙인 유관순’ 알려간다
애국신앙 계승 위한 전방위 활동 진력

유관순의 애국신앙을 계승하는 연장선상에서 한국교회의 향후 진로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유관순연구소 소장 박종선 교수.
유관순의 애국신앙을 계승하는 연장선상에서 한국교회의 향후 진로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유관순연구소 소장 박종선 교수.

천안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소장:박종선 교수)는 장종현 초대 총장의 제안으로 2000년 10월 12일 설립됐다. 전국 최초이자, 유일하게 존재해온 독립열사 유관순에 대한 전문연구기관이다.

유관순을 비롯한 지역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한 애국정신을 널리 선양하자는 취지로 학술활동과 출판사업을 펼쳐왔다. 꾸준히 발간해온 논문집은 올해 25권 째 나오고,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유관순학교는 33기에 걸쳐 1665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특히 그 동안 왜곡된 채 알려진 유관순에 관한 사실들을 바로잡은 것이 유관순연구소의 가장 큰 성과로 꼽힌다. 박종선 소장은 “지난 20여 년 간 연구소 관련 학자들과 천안지역 향토사학자들이 벌인 숨은 노력들이 빛난 결과”라고 설명한다.

3·1운동 당시 유관순이 참여한 만세시위 장소가 탑골공원이 아니라 장충단이었다는 사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후 유관순이 공주법원에서 받은 징역형은 당초 알려진 7년보다 적은 5년이었다는 부분, 유관순의 시신이 토막 난 채로 돌아왔다는 일설을 뒤집고 방광이 터져 사망한 시신으로 돌아왔다는 증언 등이 연구소의 끈질긴 작업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해방 후 유관순 열사의 행적이 처음 알려진 시점은 1947년 9월 유관순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질 무렵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정설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지난해 연구소 주최 3·1운동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을 통해, 1947년 2월 28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박계주의 ‘순국의 처녀’라는 제목의 글이 그보다 더 앞선 시점에 나왔다는 게 새롭게 밝혀졌다.

“유관순에 대해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은 열사의 충효사상과 봉사정신 등에 기독교 신앙이 바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앙인으로서 유관순의 모습은 일반인은커녕 기독교인들에게조차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박 소장은 대중들이 유관순과 만날 기회를 넓혀가는 것을 연구소의 중점 과제 중 하나로 삼고 있다고 밝힌다. 무엇보다 다음세대들이 유관순과 친숙해질 수 있도록 유튜브 같은 영상매체나 VR 같은 첨단기술을 활용한 콘텐츠 개발에 최선을 다하는 중이라고 설명한다.

연구소 설립 20주년과 유관순 서거 100주년이 맞물린 올해에는 유관순에 대한 연령별 의식수준을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대 간 인식차이를 해소하는 작업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유관순에 대한 관심과 조명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는 만큼 다양한 언어로 유관순 관련 도서들을 번역 보급하며, 웹툰 제작에도 박차를 가할 방침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당면한 난관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소녀 유관순을 이끌었던 신앙과 애국의 길로 돌아가야 한다고 박종선 소장은 목소리를 높인다.

“유관순의 정신을 계승하는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실천을 통해 다시 겨레를 책임지는 이 시대의 교회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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