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찬 목사(대구 동산교회)

박영찬 목사(대구 동산교회)
박영찬 목사(대구 동산교회)

밤 12시 조금 넘은 시간, 빨리 병원으로 와 달라는 안타까운 음성이 핸드폰 진동처럼 떨리고 있었습니다. 말기 암으로 며칠 못 넘기실 것 같다는 진단을 받은 은퇴 권사님의 큰아들에게서 온 전화였습니다.

병실로 올라가는 텅 빈 엘리베이터는 야근이 피곤한 듯 천천히 숫자를 교체하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 부임 후 첫 번째 임종예배를 드리러 가는 그날은 무학산 홈런타자인 어머니의 서원 기도로 목사가 된 것이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가장 두렵고 불안한 임종 순간에 예배를 통하여 환자와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천국의 소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기 때문입니다.

좁은 병실 공기는 허겁지겁 달려온 가족들의 체온과 더불어 고온 다습했습니다. 젖은 손수건을 꼭 쥐고 있는 딸의 손에는 누구도 달랠 수 없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막 도착했다는 작은 아들의 흐느낌은 차분했지만 깊어보였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는 권사님의 마른 손을 잡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평소에 좋아하시던 찬양을 몇 번이고 부른 후에 시편 23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순서인 축도를 하기 위하여 두 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에 일어날 은혜로운 장면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하나는 천국에 입성한 권사님께서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주님을 만나는 감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권사님의 마지막 모습이 마치 젖 뗀 아기가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과 같이 평온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조문객들이 유족들의 손을 잡고 위로하는 따스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있을지어다. 아멘’하고 눈을 뜬 순간, 초보 담임목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지금쯤이면 천국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계셔야 할 분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아잉교?”라고 인사까지 하면서 힘겹게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그때 당연히 큰소리로 ‘할렐루야’하면서 반가워해야 할 저의 표정은 병실의 하얀 벽처럼 변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는데’라는 주관적인 판단과 함께 주고받았던 몇 마디의 대화는 건조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날 이후로 남들은 한 번도 드리기 힘들다는 임종예배를 권사님은 두 번이나 더 드렸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마침내(?) 천국에서 눈을 뜨셨습니다. 나중에 천국에서 권사님을 만나면 그때는 제가 먼저 큰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드릴 것입니다. “권사님 아잉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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