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율 목사의 사진묵상-성령의 열매]

6월은 평생 목사의 사모로 사셨던 어머니께서 아버지와 큰형님의 곁으로 가신 슬픈 날이 있어 슬픔과 그리움으로 시작한다. 어머니께서 들려주셨던 많은 이야기 중에서 6·25전쟁과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과 관련한 목격담을 지면을 빌어 소개하려고 한다.

순천동부교회 1대 목사이신 아버지는 북한 인민군이 순천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과 함께 손양원 목사님이 계신 신풍 애양원으로 피난 가셨다. 얼마 후 아버지는 다른 목사님들과 함께 부산으로 가시고, 어머니는 세 아들과 함께 신풍에서 아버지를 기다리셨다. 상황이 나빠지자 어머니는 모 장로님 가족과 함께 고기잡이배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국군 탈영병에게 배를 빼앗기고, 결국 일행과 함께 신풍으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손 목사님은 이제는 하나님께 매달리자고 하면서 애양원교회에서 부흥회를 시작하셨다. 며칠 후 우려한 급보가 전해졌다. 부흥회 중에 인민군이 도달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센병 환자들은 예배당 창문을 넘어 도망가려고 했다. 손 목사님이 “도망간다고 살 것 같으냐, 예배하다가 죽으면 순교자가 된다”라고 말씀하자, 환자들이 다시 예배당 안으로 들어왔다.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손 목사님과 젊은 교인들을 포로로 잡아가던 중에 날이 어두워지자 총살했다. 그때 손양원 목사님이 먼저 총에 맞아 쓰러지셨는데 그의 밑에 어떤 청년이 있었다. 겁이 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청년을 목사님이 온 몸으로 덮으셨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애쓰신 목사님의 고귀한 희생이었다.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총에 대검을 꽂아 쓰러진 사람들을 쑤시고 다녔는데, 그 청년은 팔 사이로 칼이 지나가서 살아날 수 있었다. 날이 밝자 청년이 돌아왔고, 소식을 들은 교인들이 현장에 갔을 때에는 안타깝게도 이미 손 목사님이 운명하신 후였다. 손 목사님은 총상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몸부림치다 발꿈치가 다 벗겨지고,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한다.

손 목사님께서 돌아가신 날에 아들을 낳아 몸도 가누기 힘든 사모님께 어느 교인이 울면서 부음을 전했다. 그러자 사모님은 큰 소리로 “우리 목사님은 천국으로 가셨는데 뭐가 슬퍼서 우느냐”라고 야단을 치셨다는 게 어머니의 목격담이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2~14)

6월을 맞으면서 고귀한 생명을 바쳐 우리나라를 지킨 영웅들께 감사하자. 그리고 우리도 한 영혼을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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