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신 목사(북일교회)

김익신 목사(북일교회)
김익신 목사(북일교회)

요즘 우울할 때가 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고서도 우울했듯이 여러 가지 나라 안팎의 일로 인해 우울해지곤 한다.

한국교회가 스스로 만든 갈라파고스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갈라파고스 현상을 만난 것 같다. 주변의 변화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의 에고이즘에 사로잡혀 행동하는 바람에 고립된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누가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돌아볼 때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는 지금 엄청난 변화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심지어 예수님의 초림 사건을 계기로 BCAD로 나뉘었듯이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교회가 구분될 것이라는 막막한 예측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기에 지금의 갈라파고스 현상은 매우 우려할만한 악재인 것은 분명하다.

먼저 갈라파고스의 증후군이다. 사회구조와 사회인식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고립화 현상이다. 철저히 교회가 고립화 되어 가고 있다. 주변 사람들의 교회에 대한 독설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시대감각과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생각들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지를 되묻고 싶다. 심지어 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리더들과 학자들의 말과 글들이 그것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이 우울해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 증후군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갈라파고스 함정이다. 함정이란 쉽사리 발견하기가 어렵다. 함정에 빠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마귀가 한국교회를 철저히 고립시키기 위해 함정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정치적으로 쳐놓은 덫에 빠지기도 했으며 철저하게 이념논리나 진영논리 및 흑백논리에 이용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때론 피해의식을 이용하기도 한다. 결과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갈라파고스의 비극이다. 자신만이 옳고 타인은 무조건 틀리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사회의 다양성과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한 산물이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비극이다. 한국교회는 빨리 알아야 한다. 갈라파고스 수렁에 빠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복음은 배려이다. 복음은 관용이다. 복음은 평균을 이루는 것이다. 복음은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다. 복음은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복음은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복음은 철저하게 악의 모양을 버리는 것이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밝히셨고 우리에게 의무로 알려 주셨다. 이것이 상실이 되면 밖에 버려져 밟히는 소금이 되고 만다. 문제는 밟히는 것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갈라파고스의 반대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이다. 공동체주의는 지극히 성경적이다.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자유주의와 개인의 책임을 중요시하는 보수주의의 중간적 입장이 공동체주의이다. 다른 용어로 비슷하게 표현한다면 공화주의(Republicanism)라고도 한다. 조심할 것은 집단주의나 공산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공동체주의는 고도의 산업사회화가 낳은 지극히 이기적인 개인주의의 확산에 따른 원자화에 대한 반발로 발생한 것이기도 하다. 교회는 공산주의도 아니다. 집단주의도 아니다. 공동체주의인 것이다.

한국교회가 갈라파고스 현상을 만나게 된 배경은 십자군전쟁이다. 그런데 그 십자군의 동기와 모습과 결과가 현 시대에 갈라파고스를 만드는 일부의 교회와 흡사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십자군은 복음을 전파하거나 이교도를 멸절하거나 성지를 수호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임으로서 전쟁의 존엄을 가장하였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가이다. 선동꾼들이 있었다. 천국을 미끼로 원정대를 모집하였다. 구원을 받은 표라는 사탕발림이 있었다.

그리하여 십자군에는 어린 10대 청소년들도 다수였으며 죄수들도 있었다. 십자군이 한 사람의 욕심으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그들의 욕심에 이용을 당했다. 십자군 구성원들조차도 정상적인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설자리와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이 되기 위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들로 구성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적인 모습보다는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 시대의 모습과 흡사한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선동꾼들이 있었다. 함께 나팔을 불어주는 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자들이 있었다. 결과는 영적 갈라파고스만이 남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 냉정하게 돌아보자. 과연 복음이 있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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