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189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첫 선교사 7인을 한국에 파송한다. 7인의 선발대에 이어서 1895년 한국에 도착한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선교사 부부는 1897년 나주로 내려간다. 그리고 목포 개항에 때를 맞춰 유달산 북쪽 기슭 양동에서 목포선교부 개척에 착수한다.

유진 벨 선교사는 양동교회, 의사 오웬 선교사는 프렌치기념병원, 스트래퍼 선교사는 정명여학교 등을 차례로 개설한다. 유진 벨 선교사는 1904년 성탄절을 기해 양림산 남동쪽 기슭에 광주선교부를 개척한다. 유진 벨은 오웬·놀란·그레이엄 등 선교사와 함께 북문안교회·광주기독병원·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등을 시작한다. 1925년 57세를 일기로 양림동에서 소천한다.

유진 벨 선교사와 가족. 딸 샬롯 벨은 윌리엄 린톤 선교사와 결혼했다.
유진 벨 선교사와 가족. 딸 샬롯 벨은 윌리엄 린톤 선교사와 결혼했다.

1912년 조지아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윌리엄 린톤(William Linton, 1891~1960)은 군산 영명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 첫 둥지를 튼다. 1922년 유진 벨 선교사의 딸 샬롯 벨과 결혼한다. 1937년 전주 신흥학교를 폐쇄한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학교를 폐쇄한 것이다. 1940년 결국 강제로 추방당한다. 광복과 함께 1946년 전주로 돌아 온 윌리엄 린톤은 제일 먼저 신흥학교를 복교한다. 기전여학교 신사 터에 공중화장실을 짓는다. 신사 위에 똥통을 얹어서 보복한 것이다. 1956년에는 숙원이었던 기독대학 한남대학교를 대전에 설립한다. 1960년 소천한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윌리엄 린톤의 삶에 감사를 표했다.

윌리엄 린톤의 선교사업을 이어받은 이는 휴 린톤(Hugh Linton, 1926~1984, 한국명 인휴)이다. 1926년 선교지 군산에서 낳은 셋째 아들이다. 1940년 아버지 윌리엄 린톤과 함께 추방당한 휴 린톤은 1945년 미 해군 장교로 입대하여 일제에 맞서 싸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재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다. 휴전과 함께 전역한 휴 린톤은 1954년 순천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다. 전남과 경남 남해안 지역 그리고 호남 내륙에 200여 교회를 개척한다.

휴 린톤은 개척교회에 쓸 건축자재를 싣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택시를 타고 광주기독병원으로 가던 중 사망한다. 1984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1992년 휴 린톤의 미국 친구들이 조의금 4만 달러를 한국에 있는 아내 로이스 린톤에게 보낸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외국인진료센터장 막내 아들 존 린톤(John Linton, 한국명 인요한)은 앰뷸런스 제작에 돌입해 1995년 제1호 한국형 앰뷸런스를 만든다. 봉고를 개조해서 만든 앰뷸런스다. 아버지 조의금으로 만든 앰뷸런스다.

휴 린톤의 아내 로이스 린톤은 순천기독결핵재활원(현 순선기독진료소)을 설립한다. 세 아들이 결핵에 걸려서 생사를 넘나드는 와중에도 결핵퇴치 사업을 계속한다. 지금도 이 사업은 진행형이다. 그 현장이 바로 순천기독진료소다. 결핵퇴치사업을 물려받은 둘째 아들 스테판 린톤(Stephen Linton)은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하고 북한 결핵퇴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미국 남장로교회 한국선교 이야기와 린톤가 4대에 걸친 한국선교 이야기는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에 오롯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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