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영수 목사는 모친 정성금 권사로부터 헌신적 신앙을 이어받고 이원영 목사로부터 꿈과 비전, 정치적 리더십까지 배웠다. 그리고 그는 대구봉산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당시 증경총회장이던 양화석 목사의 주선으로 1969년 대전중앙교회에 부임했다.

이영수 목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필자도 개혁측에 있을 때 이영수 목사에 대해 정치꾼 중의 정치꾼, 즉 속물적 정치꾼으로만 알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시공간의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당시 개혁교단은 정규오 목사와 이영수 목사와의 교권 다툼으로 인해 분열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합동과 개혁이 하나된 이후에 고 박정하 장로를 통해서 이영수 목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 박정하 장로는 집사 시절부터 이영수 목사를 모셨던 분이다. 그분에게도 공과 과가 있지만 긍정적인 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중국의 등소평도 정권을 잡았을 때 “모택동의 공은 7이고 과는 3이다”라고 말하면서 국민을 결집시키는 역사적, 정신적 기틀로 삼지 않았는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과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영수 목사의 공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 교단은 있을 수 없었다고 본다.

첫째, 그는 우리 교단의 선교비전을 세웠다. 당시는 우리 교단 상비부 중에 선교부가 있었는데 1980년 총회본부 사무실을 개편하면서 선교국을 신설했다. 그래서 오늘 세계선교회의 기초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 세계선교회가 바로 오늘 GMS의 전신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길자연 총회장 시 GMS를 독립기관으로 설립했다.

둘째, 총회회관을 건립한 것이다. WCC문제로 허허벌판에서 다시 시작한 우리 총회는 아직 총회회관을 건립하지 못했다. 그런데 1973년 7월에 마침내 여의도동 1-708번지의 203평 부지를 마련하게 된다. 이영수 목사가 부산 초량교회 정태성 장로를 간곡하게 설득함으로써 그 땅을 헌납 받았다. 그러니 이영수 목사의 정치적 리더십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여의도 땅이 너무 비좁아서 총회회관을 건립하기 어렵게 되자 그는 강남시대가 열릴 것을 예견하고 당시 배밭이었던 대치동 땅을 매입한 것이다. 그때 수많은 반대와 비난이 있었지만 미래에 대한 혜안을 가지고 밀어붙였다. 그래서 지금 우리 총회는 강남 최고의 요지에 총회회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총회회관의 주차장이 부족하니 총회회관을 옮기자는 주장도 많이 있다.

그러나 옮기건 옮기지 않건 간에 말하고 싶은 것은 이영수 목사의 공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사 훗날 총회회관이 옮겨진다 하더라도 이영수 목사의 헌신만큼은 꼭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이 뿐이겠는가. 다음호에 계속 언급하겠지만 우리도 이런 총회를 위한 거시적 안목을 가지고 백년대계를 세울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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