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식 목사(군산 안디옥교회)

하나님 앞에 설 날 잊지 말고 아름다운 흔적 남깁시다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삼상 12:3)

김정식 목사(군산 안디옥교회)
김정식 목사(군산 안디옥교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본문은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정시대가 시작할 즈음에 사사 사무엘이 고별을 앞두고 지난날 사사로서 공의롭게 행한 것을 술회합니다. 사사는 ‘재판하다, 다스리다, 구원하다’는 의미입니다. 사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부터(B.C 1406~)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까지(B.C 1050)의 약 35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자, 또는 재판관으로서, 때로는 주변 나라가 침략 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가는 군사 지도자로서 백성의 안전 또는 구원을 위해 일하고, 평상시에는 정치적인 지도자로서 활약을 했습니다.

사사기 21장 25절을 보면 “그때의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사사시대에도 하나님의 성막과 율법이 있었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왕은 하나님이셨지만, 그들은 왕이신 하나님의 법을 잊고 권위와 원칙이 없어서 각기 개인적인 판단대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무엘은 “보라 너희가 내게 한 말을 내가 다 듣고 너희 위에 왕을 세웠더니 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 하느니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어졌고 내 아들들은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내가 여기 있나니”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오점없이 살았습니다. 발자취란 지나간 역사, 발자국(footmark), 일명 족적(足跡)이라고도 합니다.

사무엘은 속이는 발자취를 남기지 않았습니다.(정직)

“당신은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다”고 백성들은 증언했습니다. 열왕기상 3장 6절에서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왕상 3:6)라고 솔로몬은  왕이 된 솔로몬은 자신의 아버지 다윗이  정직하게 사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이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다(Honesty is best Policy)”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링컨이 9살 때 어머니 낸시 여사가 세상을 떠나면서 링컨에게 유언으로 “항상 정직(正直)하게 살아야 된다”고 말하면서, 성경과 정직 두 가지 유산을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았고, 대통령에 올랐어도 그 말씀에 근거해 직무를 감당하였답니다. 책을 좋아하는 링컨은 이웃집에 이사를 온 변호사 아저씨를 도와주고는 그 대가로 책을 빌렸습니다. 빌려온 책을 보다가 링컨이 잠이 든 사이 책이 물에 흠뻑 젖어 못쓰게 될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링컨이 책을 되돌려 드릴 때 솔직하게 말씀드렸더니, 변호사 아저씨에게 오히려 칭찬을 받게 되었답니다. 옥스퍼드대학 출신이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수인 J. 릴리 유프즈의 명언 중에 “정직을 잃으면 다 잃어버리는 것이다”고 하였듯이, 사무엘처럼 일생동안 속임이 없는 정직하게 살았다는 발자취를 남기고 싶습니다.

사무엘은 압제의 발자취를 남기지 않았습니다.(공의)

“내가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그러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압제란 말은 권력이나 무력 따위를 억눌러 남을 꼼짝 못하게 내리누르는 의미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말하면 ‘갑질’입니다. 을은 일반 백성들이다 보니 권세가 없고 힘이 없다고 무시당하기 십상입니다. 요즈음 힘이 있다는 우리나라 사법, 행정, 입법부의 지도자들을 보면서 지도자와 지배자는 다르다는 것을 봅니다. 지배자는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자기 권력이나 위치를 이용하여서 대체적으로 자기 생각대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정치학자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관료주의는 공무원을 의미 한다고 합니다. 관료주의란 ‘국민의 의지를 독선적, 권위적, 억압적 태도를 취하는 주의’라고 정의합니다. 관료주의가 심한 공무원들의 역사적 신조는 1)적당히 일하고, 2)서로 봐주고, 3)서로 덮어주고, 4)서로 나누어 먹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총회에는 21개 부서가 모두 중요합니다. 특히 총대들에 의해 선출되는 총회임원, 재판국원, 선거관리위원을 직접투표로 뽑는 이유는 그 직을 감당함에 있어 공의롭고 정직하게 하라는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감사부까지 공의롭게 한다면 우리 교단은 미래와 소망이 있다고 봅니다.

과거 섬기는 노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물질에 눈이 멀어서 교단을 탈퇴하고 교회재산을 등기이전 해 가버리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노회는 재판국과 환수위원회를 구성해 교회를 되찾고자 노력했습니다. 재판국원들과 환수위원들은 공교회성과 공의의 정신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라는 사무엘상 17장 34~37절의 말씀을 붙들고 일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심인 대법원의 승소로 환수한 경험을 한 바 있습니다.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이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든 누구를 막론하고 재판관 사무엘처럼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받지 않고, 공의롭게 일처리를 하여 공의의 발자취를 남겨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은 뉘 손에서 취한 것 남기지 않았습니다.(성실)

사무엘은 “내가 뉘 소나 나귀를 취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한마디로 성실하게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지 않습니다. 청빈한 삶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성실의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사람들은 시작은 멋지게 하는데 끝마무리가 아름답지 못하여 오점을 남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초심을 잊어버리고 꾸준하게 성실성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살면서 신앙인들로 인해 실망을 하곤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임에도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고 신뢰를 져버리는 행위를 하기 때문입니다. 총회 안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목사요, 장로라면 믿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합니다.

교회나 노회나 총회에서 재판할 때 헌법과 규칙 또는 총회가 결의한 것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법이 성경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의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8장 9절을 보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재판할 때 율법사들은 돌로 쳐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돌아갔습니다.(행 23:1)

사도 바울을 로마로 압송할 때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송사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바울을 공회 앞에 세웠을 때 일입니다. 바울은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 23:1)고 하였습니다. 또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행 20:18)라고 하면서 그의 성실성을 말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불신과 부정과 부패, 타락의 풍토로 인해 얼마나 많은 진통을 겪고 있습니까? 세상의 정치판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의 양심은 살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손에 촛불도 들을 수 있지만, 양심에 촛불을 밝혀야 합니다. 뇌물로 양심이 어두워져 선과 악이 뒤바뀌면 나라도, 총회도 망하고 말 것입니다. 노아시대 때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한탄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실패하였으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었던 양심이 회복되어야 소망이 있습니다. 뇌물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직하고 공정하게 판단하면, 분명히 잘잘못이 보일 것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비록 이스라엘이 왕정체제 방식으로 바뀐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신명기적 신앙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사의 모든 일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날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사무엘의 고백처럼 “누구의 소나 나귀를 빼앗았더냐? 속였더냐? 압제하였더냐?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받았더냐? 증인들이 있으면 말하게 하라”고 누구에게나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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