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1970년 당시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사당동 총신을 매각해서 양평이나 광주로 가려했던 것은 상황적 최선의 판단이었음은 분명하다. 더 광활한 캠퍼스에서 세계적인 칼빈신학과 개혁신학을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때 좀 더 많은 정보력과 미래지향적 판단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때 만약에 정규오 목사 사단이 경부고속도로를 낀 부지를 매입해서 신학교를 지었다면 문제는 다르다.

만약에 양평이나 광주로 갔다면 오늘의 총신의 눈부신 역사를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일로 총신은 1180만원을 손해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영수 목사라는 정치가가 등장한다. 이영수 목사는 신학적 라인에 서 있는 사람이기 보다는 천부적 정치인이었다. 그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의향리에서 태어나 봉화춘양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모친 정성금 권사로부터 기도하는 모습, 전도하는 모습, 교회와 주의 종을 잘 받드는 모습을 보고 자란다. 그러다가 해방 후 18세 때 장래 꿈을 놓고 이원영 목사를 만나 상담한다. 이원영 목사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었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목사 면직까지 당하고 네 차례나 감옥살이를 한 분이다. 출옥 후 안동지역 교회 재건에 앞장 선 목사였는데, 산 순교자로서 지역교회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두 가지 꿈을 꾼다. 첫째는 교회 재건이고 둘째는 학교 설립의 비전이었다. 바로 그 꿈으로 경안성경고등학교를 세운다.

18세 이영수는 바로 이원영 목사를 만나서 그의 가슴의 열정과 비전을 전수받는다. 그래서 이듬해 1946년 9월에 경안성경고등학교에 입학하고 1948년 6월 30일에 졸업한다. 정규오 목사가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다면 이영수 목사는 이원영 목사로부터 순교적 보수신앙과 교육, 학교설립의 비전, 그리고 다양한 인간관계와 사람을 키우는 리더십을 배운 것이다. 훗날 이원영 목사가 총회 정치를 하게 되는데, 이영수 목사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정치적 역량과 비전까지 배우게 된다.

이영수 목사 뿐만 아니라 경북지역에서 이원영 목사로부터 배운 제자들이 영남지역과 교계의 지도자들이 된다. 이영수 목사는 1949년 21살 나이에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다.(그때는 통합측과 나누어지기 전이기 때문에 장로회신학교가 교단신학교였음) 그러다가 이듬해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휴교를 하자 대구에 설립된 신학교에서 예과 2년, 본과 3년을 마치게 된다. 그 역시 박형룡 박사로부터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배웠다. 그는 특별히 군목을 지원하였는데 그 군목시절에 청년교육의 꿈을 키우며 동시에 총회 정치의 꿈을 꾸게 된다.

그는 총회 정치의 꿈을 이루기 위해 훗날 대전중앙교회 당회장으로 부임을 하게 되고 총회의 정치적 신학시대와 눈부신 교단 발전의 첫 삽을 뜨게 된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목표가 달라진다. 오늘 우리 교단의 목사와 장로들은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누구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가. 우리 교단을 향한 진정한 꿈과 목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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