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1970년 초반까지 우리 교단의 리더십은 정규오 목사였다. 정규오 목사는 항상 칼빈주의와 보수주의, 개혁신학을 지키는 정치를 했다. 박형룡 박사를 떠받들고, 총신의 신학이 변질되지 않도록 정치가 신학을 보호하고 신학은 정치의 보호를 받으며 활동했다. 정치와 신학이 공존을 한 것이다.

그런데 정규오 사단이 미스를 범한 것이 있다. 당시 총신 재단이사회가 극비로 사당동 캠퍼스를 1억4500만원에 매각하기로 결의를 하고 계약금 1450만원까지 받았다. 대신 경기도 광주에 땅을 계약한다. 매각을 추진한 이유는, 사당동이 개발지역이 되면서 땅값이 오르자 이것을 팔아서 양평이나 광주에 수십 만 평을 매입하여 더 크고 좋은 학교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이런 계획도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우리 교단이 빈손으로 허허벌판에서 시작해서 총신 경영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사당동 캠퍼스를 비싸게 팔아서 넓은 땅에서 학교를 짓고 더 넓은 비전을 이루려고 한 것이다. 당시 재단이사장이자 사당동 땅 1만8000평을 기증한 백남조 장로도 동의를 하였다. 그런데 극비로 추진하였지만, 이것을 당시 대학부 4학년인 김영우 학생(총신 전 총장)이 폭로를 하게 되어서 학생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그래서 1971년 6월 15일부터 9월 총회 때까지 대학부와 신대원이 모두 수업 거부에 들어간다. 어느 곳도 기록은 없지만 대학부 4학년이었던 김영우는 평안교회 전도사였기 때문에 당시 총신 비주류 계열의 수장이었던 평안교회 담임목사였던 김윤찬 목사에게 들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당시 비대위 학생들의 요구는 두 가지였다. 첫째, 불법 매각을 시도한 이사들이 사퇴하는 것이고 둘째, 지방신학교와 총신 이사를 겸임한 이사들의 사퇴를 요구하였다. 이후 비대위의 사퇴로 재산보호위원장에 배태준 장로를 세워 총신 매각에 관련된 재산 문제를 처리하게 된다. 다시 계약해지를 하고 반환을 하는 데 여러 가지 스토리가 있지만 다 언급할 수는 없고, 결과적으로 총신은 1180만원을 손해 보고 이 과정에서 손해를 줄이기 위하여 백남조 장로는 또 200만원을 헌금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볼 때는 사당동을 지키게 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본다. 양평이나 광주로 갔으면 총신이 지방대학이 될 뻔 했는데 사당동에 있어서 서울의 중심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지키려 했던 사람이 당시 대학부 4학년인 김영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71년 총신 사태로 말미암아 당시 총회 정치권 주류였던 정규오 목사 계열, 이환수, 박찬목, 노진현, 이성헌 목사 등이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 비주류였던 김윤찬 목사 계열, 김정동, 이영수 목사, 김인득 장로 등이 가담하게 된다. 그런데 이영수 목사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훗날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정치 활동가로 등장한다. 그리고 김인득 장로는 벽산그룹의 회장이 되어 총신과 총회에 많은 재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이런 총신 매각 사태로 말미암아 총회 리더십의 구심점이 정규오에서 이영수로 바뀌게 된다.

이영수 목사는 정말 총신발전과 총회발전에 엄청난 공을 세웠다. 그리고 70년 초반부터 85년까지 이영수의 리더십은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된다. 그러나 이때부터 총회의 보수신학이 정치를 끌던 신학적 정치시대에서 총회의 정치가 신학을 끄는 정치적 신학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정치적 실세였던 정규오 목사가 당시로서는 상황적 최선의 판단이라고 여겼던 그 선택에도 하자가 있어서 정치 주류에서 밀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신학적 정치시대가 정치적 신학시대로 바뀌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도 아무리 상황적으로 최선을 다해 정치를 하고 교단을 섬기려고 해도 그 판단과 결정이 우리 교단의 미래에 어떤 영향력을 미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알고 미래를 계획하며 설계할 수 있는 안목과 예견력까지 갖추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과 예견력이 얼마나 있는가.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